[정지윤의 윤리 칼럼] 삶의 예시 답안

 

문명과 기술의 발전,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 속 반복되는 일상. 나는 내가 사는 21세기 현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 삶은 너무나 편리해졌다. 기술과 통신의 발전으로 공간적 제약이 사실상 거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수많은 규칙이 존재하는 복잡한 사회 속에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그저 수행하며 하루를 보낸다. 내일도, 모레도 나는 그저 내 할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문득 무한한 우주 속 아주 작은 행성인 지구에 사는 그저 하나의 생명체인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면 이 모든 것은 허무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아직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르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서 윤리와 사상이라는 과목을 배우고 있다. 맨 처음 이 과목을 선택하게 된 까닭은 자신이 없는 과목을 제외하고 남은 하나의 과목이었고,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음 이 과목을 들을 때 나는 이 과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철학을 들을 마음도, 나의 마음에 새길 생각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나만의 철학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아주 오래전에 활동했던 철학자의 사상은 현재와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오래된 그들의 사상은 오늘날 나에게 삶의 의미를 찾아주고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진리가 있음을 깨닫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상은 스토아학파의 사상이다. 스토아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처럼 한 사람의 철학이 아니다. 아고라라는 광장에 모여 여러 사상가가 이야기를 나눴고, 그 아고라 광장에 있는 기둥을 부르는 이름을 따서 스토아학파가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사상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들이 주장한 부동심, 아파테이아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은 이미 운명지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애쓰기보다 그저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부동심에 이른다고 본다. 나는 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기력하게 어떤 노력도, 목표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 또는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진다면 그 불행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라고 하는 의미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정념으로부터 해방되라. 나는 정념을 감정과 생각을 통틀어 부르는 것이라고 주로 보는데, 욕망, 공포, 쾌감, 슬픔 등을 정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념에 휩싸인다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저 비자연적인 정념으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하고 그저 무한한 정념의 굴레에 빠지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후회를 참 많이 한다. 불과 몇 년, 몇 월, 며칠, 심지어 몇 초 전 자신이 내린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최선이 아닐 거로 생각하며 자신의 선택을 원망하고 후회한다. 그럴 때 나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이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한다. 자신이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 결과는 처음부터 당신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수 만 번을 돌아가도 과거의 당신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선택하던 사람도, 현재 후회하는 사람도 결국은 본인일 테니. 후회라는 정념에서 벗어나 정념에 초연해지면, 부동심에 도달할 것이고, 이성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것이다.

 

스토아학파 외에도 수많은 철학자의 사상들을 몇천 년, 몇백 년이 지났지만, 오늘날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답을 알려주고 깨달음을 주는 보이지 않는 예시 답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물론 예시 답안을 보고 그대로 베끼라는 것은 아니다, 내 답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을 때 삶이라는 문제에 참고가 될 철학을 찾아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이 글이 당신이 답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