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고령화 현상이나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으로 인해 복지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가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에도 2020년 기초생활수급자가 받게 될 최저생계비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토론이 열리기도 했었고, 치매 환자에게 주어지는 복지 혜택이 너무 적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합니다. 이렇듯 복지는 국민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고, 또 그렇기에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위정자들이 이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많이들 내세웁니다. 이 공약들이 모두 잘 시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이 점점 발전되어가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이 있었는지, 또 그렇다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고조선 : 있었을까, 복지 정책 제목에서 보듯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조선에도 복지 정책이 있었는지는 잘 알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조선에 대해 남겨진 역사적 기록이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고조선의 법률인 8조법도 고작 3개의 조항만이 전
여러분은 지난 10월 25일이 무슨 날이었는지 아시나요? 바로 2000년, 독도수호대에서 제정한 독도의 날입니다. 독도의 날을 맞아 각종 지자체에서는 우리 영토인 독도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고, 특히 많은 학교에서는 일명 '독도케이크'를 급식에 편성하기도 하였습니다. 독도의 날 행사는 독도가 우리 영토가 되었음을 공고히 하고, 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재 독도는 일본의 말도 안 되는 억지로 계속적으로 논란에 휩싸여 있는 땅입니다. 이런 일본의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나라 국민들부터가 왜 독도가 우리나라 땅인지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 역사적인 근거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일본, 언제부터 독도를 알고 있었나? 독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흔히 알듯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나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그 유명한 이사부 장군이 512년에 나무로 만든 가짜 짐승을 이용하여 우산도, 즉 울릉도를 정복하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때 울릉도를 정복하면서 독도라는 섬이 실존했음이 확인되었고, 지속적으로 독도에서 공물을 진상받았다고 합니다
얼마 전 한국사 수업 시간에 한국사 선생님으로부터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요의 진위 여부가 곧 가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에 관한 설화인데 사실 이 설화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1년 전 익산 쌍릉이 발굴됨에 따라 곧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이렇듯이번 발굴은 21세기 들어 한국 역사학계의 가장 놀라운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일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보자. #1. 1917, 발굴의 탈을 쓴 채 도굴된 무덤 1917년, 전북 익산의 무덤이 한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아쓰이 세이지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소속된 연구자였다. 아쓰이 세이치는 그 무덤을 도굴에 가까울 정도로 발굴해 나갔다. 장신구, 토기 같은 주요 유물만을 챙기고 무덤 주인의 뼈는 그 무덤에 그대로 놓고 온 채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2017년, 우리나라이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을 다시 한 번 발굴해 보기로 결정했다. 아쓰이 세이치의 연구 기록은 형편없어서 무덤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우리 한국사 교과서에서 수학에 관한내용은 얼마나 등장할까? 단언컨대 다 합해도 한 면 분량만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조선 시대에 수학을 중요시 여기지 않은이유가 크다. 조선 시대에서 수학은 세종 대왕 집권기를 제외하고는 발전이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조선에서는 수학 천재가 배출되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이 분, 마법의 사각형 대가인 명곡 최석정이다. 최석정(1646~1715)은 조선 시대의 정치가이자 수학자로, 조선 시대의 수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최석정은 수학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최석정은 글도 잘 써서 과거시험도 가볍게 급제하고 요직을 두루 거쳐가며 벼슬을 쌓았다. 최석정이 조정에 나아간 당시의 왕은 숙종이었는데, 숙종은 급격한 환국을 통해왕권 강화를 꾀한 왕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최석정은 숙종의 신임을 얻어 영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여기에는 적을 만들지 않는 온건한 그의 정치 성향이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이제 본격적으로 최석정의 수학적 업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최석정에 대해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 그것은
"아~ 덥다 더워" 최근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것이다. 건물 밖으로만 나서면 숨이 차오르게 만드는 뜨뜻하고 습한 공기와 따가운 햇빛 때문에 이번 여름 또한 예년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덥게 느껴졌을 것이다. 올해 여름도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해가 지날수록 날씨가 더 더워지기에 내년 여름은 어떻게 또 버텨야 하나라는 고민이 든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었더라면 여름을 어떻게 보낼지 아찔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수백년 전에는 이러한 선풍기나 에어컨도 없었을텐데 도대체 더위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더위를 이겨냈던 조상들의 지혜를 알아보자. #1. 정약용의 책 <소서팔사>를 읽어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수많은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관직에서 쫓겨나서 전라남도 강진에 19년 동안 유배당한다. 그 19년 동안 정약용이 쓴 책의 갯수는 무려 500여권에 달한다. 그리고 그 책 중 하나가 이 소서팔사(消暑八事)라는 책이다. 뜻을 해석하자면 '여름을 사라지게 하는 여덟 가지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어떤 내용이 숨겨져 있을까? 1. 송단호시 : 솔밭에서
2019년 6월 6일,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이 날은 어떤 날이었을까. 바쁜 일상 속 휴식이 되어 주었던 통칭 '빨간 날'이었을까. 혹은 어떤 이에게는 평소 미뤄두었던 여행을 즐기는 날일까. 또 일부 학교는 금요일까지 재량휴업일로 지정해 공부를 하거나, 학생들끼리 학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귀한 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6월 6일에 왜 쉬는 거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충일을 잘 지키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충일 당일날 필자가 방문하였던 전쟁기념관을 비롯해 현충원 등에서 이 날을 기리고 또 호국보훈의 용사들을 추모하였다. 또한 많은 지자체, 건물 등에서는 태극기를 내걸며 호국영령들을 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단체를 비롯한 시민들은 이 현충일을 잘 기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례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례를 찾아보기 이전에 현충일에 대해서 알아보고 가보자. 현충일의 사전적 의미는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쳐 충성한 이를 기념하는 날"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북한군과 우리 군대의 교전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큰 전쟁이 될 것이라고 예측을 하지 않았다고
4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 후, 우리 학교 동아리들은 각자 활동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가 속한 이천독립운동탐구반 동아리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 동아리는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수흥 의사 기념상으로 답사를 가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더운 뙤약볕 아래 늠름하게 빛나는 이수흥 의사의 동상을 보며 이러한 애국지사를 기억하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수흥 의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름 역사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나 또한 그를 올해서야 알았다. 그렇다면 이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이수흥 의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서 알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상처투성이 독립운동가 이수흥 의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이천시 창전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그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들이 너무도 많았었다.그는 13살 때 일제의 교육을 받는 대신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기로 하고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자퇴했다. 참고로 이천공립보통학교는 현재 이천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건물이 위 사진의 뒤편에 있다. 어쨌든 이수흥 의사는 서울로 상경하여 아버지께 가르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