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겸의 한국사 칼럼 7] 한국사로 보는 복지정책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고령화 현상이나 복지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으로 인해 복지의 중요성은 날로 커져가는 실정입니다. 얼마 전에도 2020년 기초생활수급자가 받게 될 최저생계비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토론이 열리기도 했었고, 치매 환자에게 주어지는 복지 혜택이 너무 적다는 뉴스도 심심치 않게 나오곤 합니다.

 

이렇듯 복지는 국민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고, 또 그렇기에 민감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위정자들이 이 복지 정책을 공약으로 많이들 내세웁니다. 이 공약들이 모두 잘 시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이 점점 발전되어가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는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이 있었는지, 또 그렇다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나라의 복지 정책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고조선 : 있었을까, 복지 정책

제목에서 보듯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조선에도 복지 정책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조선에 대해 남겨진 역사적 기록이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고조선의 법률인 8조법도 고작 3개의 조항만이 전해집니다. 8조법의 조항에는 '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고, 도둑질을 한 사람은 노예로 만든다'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조항에서 봤을 때, 당시 고조선의 사회가 농경과 생명을 중요시 하는 것으로 보아 많은 역사학자들이 전해지지 않는 8조법의 나머지 조항에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법안이 있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2. 삼국 시대 : 의외의 복지 강국, 고구려

삼국을 이뤘던 백제, 고구려, 신라에는 각자 나름의 복지 정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근, 홍수 등의 천지재변이 일어나면 왕이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양곡을 나눠주고 구호활동을 진행하는 형식으로 복지 정책이 실행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해당 구제책은 임시방편으로 진행된 것이라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꽤나 구체적이고 혁신적인 복지정책이 실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아는 '진대법'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진대법은 제 9대 왕인 고국천왕 재위 당시 재상인 을파소의 건의로 시작되었습니다. (194년)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구휼책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진대법은 곡식이 없는 춘궁기(흔히 보릿고개라고 하죠)에 나라에 곡식을 빌리고 빌린 곡식은 추수철인 가을이 되면 다시 되갚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는 후대 고려, 조선 시대에도 실행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와 계속 함께 해온 제도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당시 백성들은 흉작이 들어 봄에 곡식이 없을 때, 굶어 죽거나 스스로 귀족의 노예가 되는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대법이 시행됨에 따라 봄에 굶어 죽는 백성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현재 문서상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복지 제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는 출산장려책도 있었습니다. 요즈음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서 이를 타개할 다양한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데요. 정복군주로 흔히 알려진 광개토대왕이 출산장려책을 활발히 실행했습니다. 이는 광개토대왕이 백성을 사랑했기에 이런 정책을 실행했다고는 하지만, 전쟁을 펼치기 위해서는 많은 인구가 필요해서라고도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임산부를 나라에서 돌보도록 하고 남자아이를 낳으면 개 한 마리와 술을, 여자아이를 낳으면 돼지 한 마리와 술을 주었다고 합니다. 또한 쌍둥이가 태어나면 한 명의 양육비를 나라에서 지급해 주었다고 하니 어쩌면 오늘날의 출산장려책보다 더 뛰어난 듯한 느낌도 듭니다.

 

#3. 고려 : 발전되는 복지 정책

고려를 건국한 태종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흑창'이라는 빈민 구제 기관을 설치합니다. 하는 일은 고구려에서 실행되었던 진대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봄에 곡식을 빌리고 가을에 다시 갚는 형식과 동일하지요. 나중에 이 흑창은 고려 예종 때, 의창으로 이름이 변경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위보라고 하는 빈민 구제 기관도 설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서 발전을 이룬 것은 단순히 임시적인 제도에 불과했던 복지정책이 이를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설치되었을 정도로 비중도 커지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는데 있습니다. 흑창을 의창으로 개칭했던 왕인 예종은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백성 구제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사회복지 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또, 혜민국이라는 의약 기구를 설치하여 의료 혜택이 많은 백성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정책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말기에는 사회에 전체적인 혼란이 찾아오면서 이러한 복지제도가 유명무실하게 되었습니다.

 

#4. 조선 : 양날의 검이된 복지정책

아무래도 조선은 유교 국가인지라 자연스레 복지정책이 고려에 비해 더 활성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의 의창에 이어서 조선 시대에도 환곡 제도가 실행되었습니다. 또한 이 외에도 노인보호사업, 잉여 곡식의 염가 판매, 결혼자금 지원, 재해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 다양한 방면에서 복지 정책이 실행되었습니다. 또 동서대비원, 활인서 등의 의료기구도 설치되었습니다. 이렇듯 조선은 고려에 비해 더 넓은 스펙트럼으로 복지책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지책에도 숨겨진 병폐가 있었는데, 바로 "환곡"입니다.

 

 

한국사 공부를 하다 보면 한번쯤은 '삼정의 폐단'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삼정의 폐단에는 '전정의 폐단', '군정의 폐단', '환곡의 폐단'이 있는데요. 그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환곡의 폐단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이러한 폐단이 더욱 극심했는데요. 탐관오리들이 억지로 농민들에게 환곡을 빌리게 하여 가을에 훨씬 더 높은 이자를 거둬들여서 곡식을 착복해낸 것입니다. 심지어 빌려준 곡식에는 모래, 겨 등 먹을 수조차 없는 곡식을 빌려주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실행되었던 환곡이 오히려 백성들의 목을 메는 올가미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환곡의 폐단은 흥선대원군이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나서야 끝이 났습니다. 흥선대원군은 환곡 대신 사창제를 설치하여 백성들이 자치적으로 곡식을 빌리고 갚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5. 마무리

우리나라의 복지제도는 192년에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발전하고 지금까지 발전해왔습니다. 진대법, 의창, 흑창, 환곡 등의 다양한 제도를 거쳐 이제 202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최근, 복지는 우리사회의 거대한 쟁점 중 하나로 급부상해왔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복지란 무엇인가요? 복지는 국가의 수준을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입니다. 우리나라의 복지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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