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겸의 한국사 칼럼 1] 우리 동네 독립 운동가, 이수흥

4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 후, 우리 학교 동아리들은 각자 활동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가 속한 이천독립운동탐구반 동아리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 동아리는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수흥 의사 기념상으로 답사를 가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더운 뙤약볕 아래 늠름하게 빛나는 이수흥 의사의 동상을 보며 이러한 애국지사를 기억하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러나, 이수흥 의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름 역사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나 또한 그를 올해서야 알았다. 그렇다면 이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인 이수흥 의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서 알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작은 바람이다.

 

-상처투성이 독립운동가

이수흥 의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년, 이천시 창전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린 그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일들이 너무도 많았었다. 그는 13살 때 일제의 교육을 받는 대신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기로 하고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자퇴했다. 참고로 이천공립보통학교는 현재 이천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그 건물이 위 사진의 뒤편에 있다. 어쨌든 이수흥 의사는 서울로 상경하여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가정에 불화가 생겨 그의 부모님이 이혼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상심한 이수흥 의사는 학업을 접고 이천으로 돌아와 스스로 승려가 되어 출가한다. 그러나 2년간 수도생활 도중 아버지의 간청으로 하산하게 되고 속세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수흥 의사는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하다 심지어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한다. 그러다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만주로 건너가서 김좌진 장군이 세운 신명학교에 입학하여 자신을 연마해갔다.

 

1925년, 이수흥 의사는 참의부에 소속되어 소대원 30명 가량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들이 소대를 습격했고 만주 고마령이라는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수흥 의사가 속한 참의부 제2소대 소대원들은 전부 멸절당했고, 다른 소대의 소대원들도 상당수가 전사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이수흥 의사는 동료들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권총 2자루를 손에 들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출귀몰한 활약

1926년 6월 10일, 이날은 순종의 인산일을 이용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난 날이었다. 이수흥 의사는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 만세 운동으로 혼란해진 서울 시가지를 보며 이수흥 의사는 이 때가 기회임을 직감했다. 그는 곧장 서울 동소문 파출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들에게 총상을 입히는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그 해 9월, 이수흥 의사는 수원에서 고향인 이천으로 건너와 고향 친구인 유택수 의사를 만나 함께 투쟁하기를 약속했다.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그들은 이천시  백사면에 위치했던 식산회사를 습격하려고 시도하였는데, 그 옆에 경찰 주재소가 있음을 보고,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들은 우선 주재소를 습격한 후,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수원으로 또다시 은신하였다. 이수흥 의사는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물색했는데, 친일 부호를 협박하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친일 부호가 그를 일제에 밀고하자, 이수흥 의사는 친일파를 암살하는 등의 무장 활동을 펼쳤다. 이쯤되면 일제도 가만히 손놓고 있을 수 없었다. 일제는 이수흥 의사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그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이수흥이라는 사람이 이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는 것 말고는 일제는 이수흥 의사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사실 이수흥 의사의 키는 고작 5척이었다. 즉 150cm이었단는 말인데 이런 단신이 신출귀몰하게 무장 운동을 펼칠 리가 없다고 생각한 일제의 수사망을 보기 좋게 빠져나간 것이었다.

 

-체포되다

1926년 10월, 이수흥 의사는 부친이 별세하였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고 극비리에  장례를 치르기 위해 이천으로 갔다. 이를 안 일제는 300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이수흥 의사를 잡는데 총력을 쏟았다. 그러나 돈에 눈이 먼 이수흥 의사의 한 친척이 그의 키가 고작 5척뿐이라는 중요한 단서를 밀고하고, 일제는 이천 관내의 모든 남자를 수색하였다. 결국 그는 그 친척의 집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장소가 현재 이수흥 의사의 추모비가 세워진 곳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아이러니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이수흥 의사는 1928년 유택수 의사와 함께 사형을 언도받는다. 그리고 이수흥 의사는 법정에 서서 담담히 최후 진술을 남긴다.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의 독립을 성취하려고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길 바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워오신 애국지사들은 정말 많은 분들이 계시다. 한번쯤은 단순히 위인전에 나오는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우리 고장의 독립운동가는 어떤 분이 있는지 탐구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