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겸의 한국사 칼럼 5]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얼마 전 한국사 수업 시간에 한국사 선생님으로부터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바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요의 진위 여부가 곧 가려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에 관한 설화인데 사실 이 설화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1년 전 익산 쌍릉이 발굴됨에 따라 곧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이렇듯 이번 발굴은 21세기 들어 한국 역사학계의 가장 놀라운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일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보자.

 

#1. 1917, 발굴의 탈을 쓴 채 도굴된 무덤

 

1917년, 전북 익산의 무덤이 한 일본인에 의해 발굴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아쓰이 세이지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소속된 연구자였다. 아쓰이 세이치는 그 무덤을 도굴에 가까울 정도로 발굴해 나갔다. 장신구, 토기 같은 주요 유물만을 챙기고 무덤 주인의 뼈는 그 무덤에 그대로 놓고 온 채였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2017년, 우리나라이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을 다시 한 번 발굴해 보기로 결정했다. 아쓰이 세이치의 연구 기록은 형편없어서 무덤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한정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근의 이 연구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연구는 우리나라 고고학 연구사의 한 획을 그은 대발견이 되었다

 

#2.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선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앞서, 이 쌍릉에 대해 알려져 있던 정보는 이렇다.

 

"쌍릉은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나눠져 있는데 아마 부부의 묘지일 가능성이 크다"

"무덤의 양식으로 보아 무덤은 백제 후기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무덤의 크기와 100년 전 토출된 유물로 보아 백제의 고위 귀족의 묘일 가능성이 크다"

 

연구가 진행되기 전에는 많은 학자들이 정확하진 않아도 대왕릉의 주인은 백제의 제 30대 왕인 무왕이며, 소왕릉의 주인은 '서동요'라는 설화에 따라 신라의 선화 공주일 것이라는 설이 주류를 이뤘다. 연구는 쌍릉 중 대왕릉만을 발굴하여 진행되었고, 곧 소왕릉도 발굴할 예정에 있다. 그리고 연구가 종료된 2018년 7월,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무덤 내부에서, 한 남성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100년 전에 이미 익산 쌍릉을 발굴한 아쓰이 세이지가 기록한대로 아쓰이가 그 유골을 한 곳에 모아놓은 채였다. 각 분야 석학들은 이 유골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무덤의 주인은 무왕일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유골을 분석한 결과, 유골의 주인은 약 160~170cm 신장의 건장한 체격의 남성으로, 사망한 시점에는 60~70대였다. 연대측정법 검사 결과 유골은 620년에서 660년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무왕은 이 즈음에 사망했고 사망 당시에는 60대 중반이었다. 당시의 사료에 의하면 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건장한 체격이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시대 평균키가 161cm인 것을 감안하다면,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인 것이 확정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유골에서 드러나는 뼈의 질환이 중년 남성에게 나타나는 질환인 점, 무덤의 규모가 기존에 발견된 왕릉의 규모에 비해 비슷하거나, 그 이상인 것을 들어 이 무덤의 주인이 무왕임이 확실시되었다. 쌍릉을 발굴한 연구자들은 대왕릉이 무왕의 무덤인 것이 확정되자 왕에게 인사를 하며 왕에 대한 예의를 표했다고 한다.

 

 

#3. 그래서, 무왕이 누군데?

 

 

무왕은 백제의 30대 왕으로,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유명한 의자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무왕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한 가지가 있는데, 위에서도 서술한 '서동요'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나오는 야사 중 하나인데 조만간 발굴될 소왕릉에서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가 갈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서동요에 따르면, 무왕은 원래 가난한 왕족 출신으로, 근근히 마를 캐 먹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어쩌다 국경을 넘어서 신라로 넘어가게 되고, 그냥 거기서 마를 팔아보기로 한다. 그러다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러나 선화공주에게 접근하고 싶어도 도무지 접근할 방법이 없지 않은가? 무왕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무왕은 자신을 서동이라고 부르면서 "신라 아이들에게 밤마다 서동이 선화 공주를 안고 간다"라는 노랫말을 가르쳤다. 결국 이 무고한 소문은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고 선화공주가 먼 곳으로 유배당하기까지 이른다. 그 때를 타서 무왕은 선화 공주에게 접근하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서동, 그러니까 무왕은 백제로 돌아갔더니 자신이 왕에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 삼국사기의 내용인데, 이 내용이 사실인지는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애초에 무왕은 재위 기간 내내 끊이지 않고 신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정말 선화공주가 왕후였다면 신라를 공격하게 내버려뒀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비슷한 이유로 이 설화는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4. 이 이야기를 통해서

 

삼국 시대의 무덤 중 왕릉이라고 명확히 밝혀진 경우는 거의 없다. 특히나 백제의 경우에는 무령왕릉을 제외하고는 확실한 왕릉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왕릉의 발견은 더욱 뜻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실을 우리 학교 한국사 선생님을 통해 최근에 접하게 되었고 이 기사를 쓰게 되었다. 나름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 놀라운 발견을 얼마나 알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무왕릉의 발견 외에도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움직임은 날로 커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비석 덕후인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이 추가로 발견됨에 따라 우리 교과서에는 북한산 순수비, 단양 적성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외에도 외워야 할 비석이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역사를 알아내고 밝히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어떤 발견이 이루어졌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