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아의 사회 칼럼] '이백충'과 경제성장지상주의

내가 나온 초등학교는 참 좋은 학교였다. 선생님들이 아주 친절하셨고 병설유치원 유리창을 맞혀도 마음껏 축구 할 수 있었으며, 뒤는 산이고 앞은 논밭이어서 자연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친구들 사이에 그 어떤 격과 장애물도 없었다. 다른건 내 모교의 특성이라 쳐도 이 마지막 대목은 사실 너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백충'이라는 말이 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진. 월급이 200백만원 언저리인 아버지를 둔 아이를 비하하는 표현인 '이백충'이란 단어가 그 어린 입들에서 뱉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1

 

같이 신나게 놀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서로 급을 나눈다는 것. 분명 이것은 우리사회가 신분사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조선의 신분사회는 역사의 저 편으로 사라졌지만 21세기 한국에는 다른 성격의 신분사회가 들어섰다고 보여진다. 이런 역사적 비극의 연출자는 내가 봤을 때 '경제성장지상주의'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효용을 늘리는 것에 크게 집중한다. 효용은 재화나 서비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데, 그 크기는 우리들이 상품에 기꺼이 내고자 하는 돈의 액수로 측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우리가 가진 돈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가시키는 방법은 우리가 가진 돈의 액수를 늘리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소득을 늘리거나 혹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량을 늘려 가격을 떨어뜨림으로써 달성 할 수 있다. 이 ‘늘어남’이 바로 경제성장이다.

 

어느 순간 더 많은 효용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는 소득 증가가 필수라는, 즉 경제성장이 필수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경제성장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기업의 지위 상승이다. 경제성장의 주체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기업에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는 일꾼으로서 역할을 다하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기업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주체이고, 우리들은 그 기업에 기여하는 일꾼이라고 했다. 이런 조건이 불러 일으키는 결과는 필연적이다. 노동의 보상으로 받는 임금이 그냥 돈이 아니라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 정도'를 ‘상징’하는 ‘상징물’로서 개개인들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이는 곧 사람들 사이의 임금 차이가 사회의 신분화로 이어짐을 의미한다.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 정도로 사회적 대우와 지위와 인식과 존중을 차별화하는 신분사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경제성장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것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가 실질적으로는 부재하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백충'이라는 비극적인 언어가 여기서 잉태됐다.

 

근데 도대체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라는 게 정확히 뭘까? 정말 소득의 크기가 그것을 측정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으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도 있겠지만 고평가되거나 저평가되는 경우도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이 창출하는 사회적, 경제적 효과는 그보다 훨씬 크지만 몇천 원만 돌아간다.2 가정주부의 노동은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소득을(화폐) 발생시키지 않는다. (화폐)소득의 크기로 평가하자면 이런 이들의 경제성장 기여도는 제로에 가까운 것인가?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일을 잘 들여다보면 그 소득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없이 모두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톱니들이란 걸 알 수 있다. 평균적인 경제 생활 수준을 모두에게 보장하는 건 일단 잠시 제쳐두더라도, 모두에게 똑같이 사회적 존중이 배분되어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한 것 아닌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임금의 차이 그 자체는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뜻하질 않는다는 점이다. 임금 차이는 산업별로 이윤이 많이 남는 부문과 적게 남는 부문, 이 사이 스펙트럼 어딘가에 위치하는 갖가지 부문들 간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 또 개개인의 능력과 소질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너무나도 정상적인 상태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경제 현상’일 뿐이다. 그것을 사회로 끌고 나와서 신분화하는 것에는 그 어떤 합당한 이유도 없다. 그것은 그저 경제성장이 최고이며 그에 대한 불분명한 기여도로 사람들을 줄 세우는 알량한 이념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경제성장 시스템은 자유를 실현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위대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인간을 수단화하여 그 존엄에 등급을 나누는 체제일 뿐이다. 물론 경제성장으로 우리는 너무나도 큰 득을 봤다. 하지만 득을 본 기간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다. 90년대부터 슬금슬금 시작된 계층 간 경제적 격차는 이제 끝장을 보러 달려가고 있다.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1,908시간으로 OECD에서 3등을 차지했다3(평균값이니 저것보다 많이 일한 사람도 있을 테고 적게 일한 사람도 있을 테다). 기후변화는 세계의 약한 고리, 즉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부유한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때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제성장이 가능하고 효과적인 방식이며 옳은 길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근본적으로, 우리는 언제까지 경제와 그것의 성장을 머리 위에 두고 숭배하며 자신을 수단화할 것인가. 이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 구분 짓고 있는데 말이다. 또, 이 문제의 맨 처음엔 끊임없는 효용의 추구가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진정 끊임없어야 할 것은 자연의 유한성에 대한 생각과 진정한 효용, 즉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경제성장에 대해 몇 번 언급했다. 사실 경제성장에 대한 믿음은 소위 ‘좌, 우파’를 가리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 중심에는 경제성장이라는 가치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그럼 '이백충'이라는 대사로 비극을 연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계속 봐야 할 것인가. 알 길이 없다. 거대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는 매직은 없으며, 사실 거대한 문제란 우리 주변에 조각난 채로 산재한 문제들에 지나지 않는다. 단,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명확하다. 저 비인간적인 우상을 끌어 내리고 그 자리에 평등이라는 가치를 옹립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모든 아이의 입과 귀에서 '이백충'이라는 말, 그 진짜 벌레를 떼어 내야 한다. 

 

참고 및 인용자료 출처

1.참고:https://news.mt.co.kr/mtview.php?no=2019111413072762375

2. 참고: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21665

3. 참고: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20703#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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