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자전 신철규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 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혀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렸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1 필자는 신철규 시인의 ‘슬픔의 자전’이라는 시를 함께 공유하고 싶다. 실제 신철규 시인의 시집 표제작으로 쓰이기도 한 위 작품은 문학 애호가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시이다. 시라는
‘아이히만은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희대의 화두로 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 학살의 실무자로 유명한 아이히만은 재판장에서 자신은 죄가 없고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가 생각하기에 아이히만은 무죄이다. 그저 상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반드시 상하 관계가 성립되기 마련이다. 더욱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사와 부하직원과의 관계 직위가 명확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만 행동한다면 열에 아홉은 직장에서 해고당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연유로 직장을 잃게 될 경우, 개인은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정신적 트라우마도 느낄 수 있다. 정말 현실적인 측면에서 바라봤을 때 이러한 실패를 감수하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히만 역시 자신이 한 행동이 도덕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사회적 지위 관계와 같은 구조적인 분위기가 어쩔 수 없이 그가 자기 생각을 뒤로하고 맹목적으로 상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결과를 도래했다고 본다. 따라서 필자
필자는 ‘쓰는 사람이 곧 읽는 사람이다.’라는 말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모방을 통한 창작의 중요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바라봤을 때도 다른 작품을 많이 읽어야 좋은 창작이 가능하다. 다른 문학작품을 읽고 그곳에서 얻은 영감이 은연중에 내재해 있다 창작자에 의해 새롭게 재창조되는 과정을 거쳐 문학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이라고 본다. 전 세계의 넘쳐나는 서적들도 위와 같은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또 아무리 읽지 않고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살면서 글을 단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쓰는 사람이 곧 읽는 사람이고 읽는 사람이 곧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문학은 소수들만 즐기는 예술이 되어가는 것 같다. 다른 미디어 장르에 반해 대중화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문학이 단순 문학을 읽고 창작하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면 가치가 퇴보해 결국 예술시장에서 살아남는 것은 각종 다양한 뉴미디어 매체들뿐일 것이다. 위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했다면 해결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순수문학의 성질은 보존하면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삶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의 연속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고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판단하는 행위는 어쩌면 아주 당연하고 원초적인 의식 흐름의 결과라고 통칭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판단은 의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입장에서 판정 짓기 마련이다. 이는 우리가 타인으로부터 받는 모든 판단이 그 형태가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두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인간은 감정에 유동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타인에 대한 객관적 판단을 내리기란 더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들의 세계에서 제멋대로 만들어놓은 판단의 테두리 속에 자신을 잃어갈 수 있다. 특히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판단이 곧 ‘나’라는 사람의 가치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특히 현대에는 다수결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자신에 대해 같은 종류의 평가를 하면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하려는 경향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판단은 개인 편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절대 객관적일 수 없고 답이 될 수
“여자일 땐 안 울었는데 엄마 되고 웁니다” 삼성카드 베이비스토리 편 카피 문구이다. 그런데 광고 대상이 카드라고 하기엔 내용과의 상관관계가 다소 비약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 낯선 감각은 ‘감성 마케팅’에서 출발한다. 소비자의 감성적 동인을 자극해 판매를 촉진 시키는 마케팅 기법을 영상 광고에 적용한 사례이다.1 즉, 평면적인 형식으로 단순 브랜드만 홍보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일종의 스토리텔링 식 구조를 차용해 친근한 가족 이야기로 변주를 준 것이다. 시청자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 주안점을 두는 이 감성 광고는 기존의 상술 식 경영보단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4차원 경영시대에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했다. 대중이 익히 알고 있는 박카스 광고나 초코파이 광고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정서적 유대는 소비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접근할 방법인 동시에 판매를 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감성을 전달하는 방식이 감성을 이용하기만 하는 데에서 그친다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크다. 필자가 서두에 인용한 문장을 보자. 언뜻 넘길 수도 있으나 다시 한번 짚어보면 성차별적 요소가 다분하다.
우리의 봄이 만개했다. 벚꽃이 떨어질 때 쯤, 마스크도 벗을 수 있길.
독자들은 ‘코로나 레드’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시사용어는 코로나 19로 생겨난 우울감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Corona Blue)'를 넘어선 상태로,장기화 되는 감염병 상황에서 촉발한 우울함이나 불안 등의 감정이 분노로 폭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용: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118852&cid=43667&categoryId=43667) 바이러스로 인해 고조된 개인의 불안과 공포의 심리가 사회에 대한 격분과 혐오의 감정으로 변질한다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 여러 차례 보도된 노 마스크 시비 사건을 비롯하여 확진자를 가해자로 비난하는 시선들, 경기 침체로 인한 가정 내 불화 급증 현상 모두 분노가 불러온 재앙이다. 이렇듯 혐오와 폭력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초연결 네트워크 사회인 오늘날, 위와 같은 분노심리가 대중매체를 통한 온라인 차별 표현으로 가시화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우한 폐렴, 대구 코로나 등 바이러스 앞에 특정 지역 이름을 명기하는 것도 병의 발원지를 둘러싼 분리 인식이 투영된 지역 차별 사례이다. 더욱이 최근엔 비대면 소통 영역이 확대되며 익명의 자유를
국내, 게임 사용자 수가 날마다 증가하며 게임 시장도 활동 범위를 넓혀가는 추세이다. 근래에는 외국 기업과 연동된 게임회사들도 여럿 들어서며 새로운 게임 콘텐츠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시점인 만큼 전보다 장르와 종류도 광범위해졌다. 한국이 온라인게임 강대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해외에서의 입지도 올라갔다. 이렇듯 국민의 온라인 게임 관심도와 참여율이 높아짐에 따라 기능성 게임도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기능성 게임은 이름에서 말해주듯 단순 오락적 요소들을 넘어 현실에서 벌어지는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종의 목적성을 가진 게임을 말한다. 뚜렷한 메시지가 내포된 만큼 최근엔 그 분야도 다양해졌는데 필자는 그중에서도 사회문제를 다룬 게임을 핵심적으로 다뤄 보려고 한다. 오늘 함께 살펴볼 게임은 ‘웬즈데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다룬 이 게임은 역사를 재조명하고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망각하지 말자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게임 개발자는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신 故 김학순 할머님의 증언 일이 수요일이었으며 이후 피해자분들이 매주 수요집회를 이어오고 계시는 것을 반영하여 특별한 의미가 있는 요일을 기리기 위해 ‘웬즈데이’라는
‘음식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위안거리다.’라는 명언처럼 인간과 음식은 상부상조하며 발전해왔다. 요리하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핵심 요소가 되듯 의식주에 있어 ‘식’은 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나라별 가치관에 따라 음식의 성향도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국민적 특징을 함께 알아보겠다. 먼저 우리의 이웃 나라인 일본의 음식 문화와 국민성에 대해 살펴보자. 오늘 필자가 소개할 일본 음식은 바로 벤또이다. 벤또는 한국어로 쉽게 해석하면 도시락을 의미하며 밥상을 아주 작은 상자 모양으로 축소한 미니어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식물을 보다 좁은 공간에 담아 간단하게 운반하려는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음식의 맛보다도 밥상을 축소하여 가 동적인 음식으로 만든 일본인의 발상법과 기능적 구조이다. ‘준비해서 쓰기에 편하도록 맞춘다.’라는 벤또의 어원을 살펴보면 일본 문화 전체가 벤또 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일본 국민들은 실용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이 내재하여 있으므로 크고 흩어져있는 것들을 보면 무엇이든 좁은 공간에 채워 넣으려고
영화, 게임, 책, 만화 등 장르를 망라한 여러 매체에서 호러물은 하나의 분야로 범주화된다. 코미디, 로맨스, 다큐멘터리와 같은 카테고리에 반해 공포 테마는 비교적 현실과 상충하는 요소들이 다소 있음에도 뚜렷한 개성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여름이 오면 많은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공포 영화를 떠올리는 것만 봐도 호러 장르가 대중화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실성과 개연성의 결핍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공포, 호러, 괴담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사회 환경과 분위기에서 기인한다. 괴담 열풍의 근원지는 대체로 경기침체, 정치 불안 등 암울한 시대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회가 힘들 때 공포물의 수요가 급증한다고 한다. 괴담 역사의 시초가 되었던 1980년대에는 유괴사건, 강간 범죄, 인신매매 등 범죄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범람하던 시기였다. 일본에서도 1990년대 초반 버블경제로 경제 위기가 심화하였던 시기에 호러 장르가 큰 인기를 끌었다. 호러 장르의 성행이 부진했던 우리나라 역시 IMF 사건 이후 ‘여고괴담’, ‘텔미썸딩’ 등의 잘 알려진 공포물들이 발표됐다. 호러 문화의 유행 시기와 사회적 상황의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듯
보편적인 관점에서 저널리즘과 문학은 애당초 궤를 달리한다는 해석이 다반사다. 문학적 글쓰기의 접근 방식과 저널리즘적 글쓰기의 접근 방식은 집필 의도에서부터 확연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문학은 작가의 상상 또는 창의력 등 주관적인 개인의 감상과 감정을 요구하는 반면 저널리즘적 글쓰기는 필자의 의지개입 없이 단순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 보도하는 데 의의를 둔다. 하지만 극명하게 성격이 다른 문학과 저널리즘을 무 자르듯 구분 지어 예단하는 것에는 한계점이 있다. 문학과 저널리즘이 같은 글이라는 범주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같은 작품을 일례로 들 수 있겠다. 전직 기자로 활동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작품에서는 저널리즘 형식의 다소 사실적이고 꾸밈없는 건조체들이 많다. 이렇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열한 문장들이 문학적 성격에 맞지 않아 작품성을 떨어뜨리는가. 전혀 아니다. 헤밍웨이의 기교 없는 문장은 오히려 작품의 고요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발현 시키는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측면에서 노인의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저널리즘의 성
신파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혹은 타인이 하품하는 것을 본 후 자신도 하품한 적이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이 위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필자 역시 일상에서 다른 사람의 상황 또는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렇듯 특정 감정은 나와 타인 사이 형성되는 관계의 깊이를 떠나 한 상황이나 사건 속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다. 즉, 이성과 논리보다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 감정이 외부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타인의 정서에 이입하여 감정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공감의 시작이다. 하나의 생리현상처럼 본능의 영역에서 시작되는 공감은 거울 뉴런이라는 과학이론과 상관관계에 놓여있다. 거울 뉴런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의 행동과 감정을 그대로 모방하여 타인의 상황에 마치 자신이 상대방이 된 것 마냥 반응한다는 개념이다. 이탈리아 심리학자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 교수가 흥미로운 실험을 통해 거울 뉴런이론을 가시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실험내용은 간단하다. 원숭이에게 다양한 동작을 시켜보면서 그 동작을 할 때 관련된 뇌의 뉴런이 어떻게 활동하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질문과 대면하게 되고, 그 무수한 질문에 답을 내리며 살아간다. 유아기에는 비교적 그 질문의 내용이 다양하다. 그러나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수많은 질문의 갈래는 하나로 좁혀진다. 어른들은 답을 정해놓고 아이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답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마치 호구조사처럼 아이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단골 질문이 있다. 바로 ‘장래 희망’이다. 장래 희망과 사유가 적힌 백지 앞에 누구나 한 번쯤 망설여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사실 장래 희망에 관한 질문은 학교뿐만 아닌 부모님, 지인 등 이 사회의 모든 어른에게서 듣게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이렇듯 지금은 장래 희망과 관련된 질문을 주고받는 것이 마치 하나의 전통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에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새 학기만 되면 학교에서는 신고식이라도 치르듯 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는 일이 부지기수다. 이에 학생 대부분은대중적인 직업 중 자신의 구미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여 적기 마련이다. 이렇게 직업을 정한 학생들은 그 직업만 보고 달려가게 되고 어쩌면 학창 시절의 모든 시간을 맹목적으로 자신이 꿈꾸는 직업을 위해 소비할 수도 있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서울의 한 고깃집에 갔다. 불판에 구워지는 고기보다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식당의 전면에 붙어있는 문구였다. ‘1인 고객 적극 환영’ 문구를 한없이 들여다보다 식당에 눈을 돌리니 곳곳엔 1인용 테이블과 1인용 불판이 구비되어 있었다. 고깃집 내부에는 혼자 온 손님들이 반 이상이었고 모두 각자의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2~3년 전부터 혼밥, 혼영, 혼술 이라는 말들이 유행처럼 퍼졌다. 이는 모두 나 홀로 문화에서 파생된 신조어들이다. ‘나 홀로 문화’란 말 그대로 혼자 생활하는 ‘나홀로족’이 늘어남에 따라 만들어진 문화를 일컫는다. 1인을 위한 문화생활권이 많이 활성화되는 추세라고 하더라도 혼자 음식점만 가도 무언의 눈치를 보게 되는 일이 흔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식당의 풍경에서 말로만 듣던 나 홀로 문화를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이러한 독신 가정이 급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지만,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주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사는 생활권도 빠르게 진보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시대와 환경의 발전이 우리의 일상에 물리적 편리를 제공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