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의 독서 칼럼] 선과 악의 그 모호함에 대하여

'라쇼몽'을 읽고

교과과정에서 일본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며 알게 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 제목에서 ‘참 기괴하다’라는 공통된 느낌이 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라쇼몽’으로 사전적으로 외성은 둘러싼 성을 의미하고 그 성의 대문을 ‘나성문’(羅城問) 이라고 한다. 이와 다르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현 교토 중심부에 있는 나성문(羅城問)을 가리키는데 이 문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의 것으로 폭풍우로 파괴된 채 황폐하게 남아 여러 기담을 낳고 도적의 소굴이 되었던 곳으로 그 역사적 배경부터 기괴함을 풍긴다.

 

 

실직된 무사(주인공), 헤이안 시대를 고려하면 주인에게 버림받은 무사라 해도 무리가 없겠다. 비가 오는 날, 황폐한 라쇼몽을 지나던 직업을 잃은 주인공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지만, 사람으로서 도리를 잃지 않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자 다짐한다. 그러나 이후에 상황은 그의 다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현실과 이상 간에 내면적 고민을 하고 결국 그는 그 경계를 넘어 버린다. 내가 읽은 ‘꿈의 분석’(프로이드)을 참고하면 자아와 초자아의 싸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 현실과 타협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 것인가? 작가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닌지 나름 또 한 번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가 의도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 애쓰기만 쉽지 않다. ‘하인이 직업을 잃어서’라고 시작하는 이야기. 왜 작가는 이런 상황을 설정했을까? 처음에는 별다른 의문 없이 읽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인간에게 생존의 욕구는 가장 원초적이고 실제적이라 할 때 직업을 잃었다는 설정은 그 욕구가 좌절되는 상황을 설정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죽은 여자의 시체가 죽기 전에 뱀 고기를 말려서 고기를 판 것과 그 죽은 여성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는 노파의 행동과 그리고 그 노파의 옷을 훔친 하인을 통해 이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보고 이것이 악의 순환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여인의 모습에 시체를 훼손하는 행위를 정당하다고 하는 노파와 그런 노파의 옷은 내가 살기 위해 훔쳐도 된다고 정당화하는 주인공으로 악은 흘러간다. 선과 악의 경계선이 되는 ‘라쇼몽’. 문은 보통 다른 공간을 이어주는 곳이거나 아니면 경계선인데, 책의 시작에서 ‘라쇼몽’의 다락방에 올라가는 주인공은 선을 추구하고, 악을 증오하지만 나갈 때, 노파의 옷을 훔친 악의 존재가 되어 나온다.

 

 

선을 추구하고 악을 부정했던 주인공은 죽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는 노파를 시체 훼손하는 악의 행동으로 규정하고 자기가 가지는 도덕성에 대한 증거를 찾은 듯 노파를 차버리지만 결국 노인의 옷을 훔쳐 달아난다. 그도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버렸다. 이 책의 제목이 ‘라쇼몽’이 되는 이유를 찾게 된  순간이었다. ‘라쇼몽’은 황폐한 곳의 안과 밖을 경계하는 문으로 마치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는 상징적 의미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인간은 현실에서 끊임없이 그 사이를 두고 갈등하지만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게 되는 개인의 선택이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마치 작가가 인간을 실험대에 올려 시험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 긴장하게 한다. 작가 스스로 선과 악의 경계에서 번민한 흔적이 그대로 작품에 묻어낸 듯하다. 인간의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선과 악을 넘는 모습에서 결국 주인공마저 선의 경계를 넘어 버리는 모습에 현실과 타협하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발견한다. 나 또한 극도의 결핍상태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이 작품을 이해할 수록 어려워졌다. 한편으로는 생존의 위협을 이유로 그 행동을 합리화하여 스스로 보호할 수 있겠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것은 그 갈등의 무게만큼 그 상황이 위급하고 그 해결방법을 알 수 없어 평정심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경계에서 갈등할 만큼 자신이 처한 어려운 상황이라면 자신이 가진 생각에 더 집중하고 최적의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이같이 최적의 선택을 위한 생각은 무조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평소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 고민하고 꾸준하게 실천하는 과정으로 농축된 진하고 깊이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과연 선과 악의 영역으로만 인간의 복잡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극단적인 두  사이에 있는 여러 복잡한 관계를 무시해도 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것은 이성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영역으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인간이 정한 경계보다 유연한 도덕적 판단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생활만 해도 수많은 교과과정과 그 외 여러 활동으로 이렇게 복잡한데 인간의 세계를 선과 악의 둘로만 나눈다는 것이 너무 단순하고 경직된 생각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세상을 선과 악의 사이에 생존하는 인간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그가 생존했다면 직접 묻고 싶은 말이다. 그 사이에 더불어 살게 하는 인간만의 것이 있는데, 그것을 나는 관용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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