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빈의 독서 칼럼] 유전자 조작의 윤리, 완벽에 대한 반론

유전공학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 일까?

자신이 임신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 사회는 유전공학의 안전성이 보장되었고 빈부격차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나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나는 내 아이의 성별, 외모, 키 등에 관한 유전형질을 조작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집필한 마이클 샌델의 또 다른 저서, '완벽에 대한 반론'에서는 유전공학을 빈부격차, 안전성 등의 실질적 문제가 아닌 도덕성과 정의에 대한 견해로 풀어나간다. 

 

 

이 책에서의 핵심은 삶과 생명을 선물로 여겨야 한다는 점이다. 책 속에서는 강화 윤리, 맞춤형 아기 설계, 우생학, 배아 윤리학 등의 이슈들이 등장하지만, 이 중 나는 배아 윤리를 중점적으로 다루어보려고 한다. 배아 윤리학에서 이슈가 되는 부분은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배아를 복제하고 연구에 사용해도 되냐는 문제이다. 줄기세포는 사람의 신체적 결함을 보충하는 데에 있어서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될 세포이고 향후 기술의 전망도 밝다. 여러 사람은 배아, 혹은 포배를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데 그 이유로 배아를 한 인격체와 동일한 존엄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완전한' 존엄성을 가진 인간인지가 명확하지 않음으로 배아를 인간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결함을 마이클 샌델은 짚어낸다. '무더기 역설'을 언급하는데, 이는 밀 한 올과 밀 한 무더기에서 얼마큼 모여야 하는 '무더기'라고 칭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한 올과 한 무더기를 동일하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배아와 태아가 똑같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만약 20개의 배아와 5살 여자아이가 화재 사고 상황 속에 있다면 누굴 먼저 구할 것인가? 여기에서 5살 여자아이 한 명을 먼저 구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면에서 배아는 나름의 매우 중요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지만 한 태아, 혹은 한 아이, 한 인격체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배아 연구에 반대하는 입장 중 인간 줄기세포 연구의 미끄러운 경사길 역할이 될 수 있다거나 난자와 수정란의 상품화를 촉구할 수 있다 등의 기타의 의견도 있지만, 이는 모두 배아 연구가 필연적으로 초래하는 위험이 아니라고 책에서는 언급한다. '완벽에 대한 반론'에서는 배아 줄기세포 복제를 맹목적으로 막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신비를 지키기 위해 여러 규제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참고: 도서, '완벽에 대한 반론' p.158-159)

 

유전공학이라는 기술 자체는 정말 흥미롭다. 맞춤형 아기를 설계하는 것처럼 인간의 탄생, 출산의 시작점부터 인간이 손을 댈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정말 매력 있는 부분이다. 유전공학을 통해 우리는 유전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고 신체적 능력을 키우고 자신이 원하는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과 생명을 선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만들어냈다고 가정해보자. 부모는 아이를 선물 같은 존재가 아닌 자신이 만든 소유물로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훼손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배아 연구에 있어서 나는 마이클 샌델과 같은 입장을 취하지만 그렇다고 배아가 존엄성이 없는 사물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배아와 인간은 존엄성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는 모두 배아와 인간, 둘 모두가 존엄하다는 전제를 가정으로 한다. 

 

유전공학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이며 계속해서 윤리에 대한 논쟁은 지속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의 도서, '완벽에 대한 반론'은 유전공학의 본질의 윤리에 대한 방향성을 잡아주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유전공학의 전망이 밝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현대 사회에서 '완벽에 대한 반론'을 읽어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로써 이 책을 읽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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