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유독 자살을 선택해 생을 마감하는 작가들이 많은 것 같다.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1925~1970), 일본인으로 처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 다자이 오사무(1909~1948) 등이 그 예이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이런 죽음의 원인에 대해 그들의 수치심을 못 참고 자신을 냉혹하게 처벌하는 고유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했다.1( worldallstory.tistory.com ‘기묘한 스토리 지독한 일본의 자살 숭배 문화’ 인용). 그러나 일본인들의 특성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즉, 작가들 자신 스토리를 간과할 수 없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몇몇 작가들의 삶을 보자면 부모와의 관계가 불안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 믿을 사람은 부모가 전부일 것인데 그렇지 못한 환경으로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들에게 삶은 혼자서 살아내야 할 무거운 과제였을 것 같다. 조건 없이 기댈 수 있는 누구가 있다는 건 힘을 얻게 하는 데 그것을 경험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삶은 공허하고 버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식보다 아버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작가와 비평 p.160 인용)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앵두’에 쓰인 문장이다. 이 문장을 몇 번씩 읽어 봤지만 그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부족한 것인지,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나의 고정된 관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앵두’는 다자이 오사무가 생을 마감한 1948년에 쓰인 작품 중 하나다. 당시, 작가의 생각과 정서가 작품에 어떤 모습으로 녹아 있는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같은 해에 쓰인 ‘인간 실격’을 읽고 난 후, 그 여운이 남아 ‘앵두’를 읽게 되었다. 여전히 그의 갈등하는 마음이 그 안에 짙게 깔려 있었다. 화자이자 장애아를 둔 아버지는 마치 성인군자처럼 자식 앞에서 허세를 연출하기도 하고 자식을 안고 물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경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식이 멀쩡해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의 생각일 뿐 그는 어떤 결정도 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아이와 동반자살을 생각했던 아버지를 바라보자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로 나 자신을 던져버리는 듯해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때에 따라 가장이란 자리가 더 부담스러웠을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1 요조의 생각이다. 세상을 자기로 살아 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이 버겁던 요조는 약물의 도움으로 살았어야 했다. 약물중독이 점점 심해 짐에 따라 주위 친구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으로 ‘나를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라고 생각한다. 존재감 없는 자기의 무가치함을 또 한 번 확인하는 듯했다. 자기 상실로 인한 그의 짙은 우울감이 그 안에 가득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2 라는 요조의 독백. 처음부터 그는 자기 고백으로 무엇을 바랐던 것인 것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심약한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나를 도와 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지.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그에게 한 번쯤 손을 내밀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안에 자신에 대한 자책도 느껴진다. 후회했을까.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자신도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다자이 오사무는 혹시 ‘다른 사람들과 나는 다르다’는 오만함이 저 깊숙하게 있었던 건 아닌지 생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1.' 인간실격에 쓰인 이 문장을 읽을 때 작가의 삶이 궁금해졌다. 인간은 자아의 심적 고통을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무분별한 자기방어 기제를 사용한다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학설이 생각났다. 그와 다르게 자신의 미숙했던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듯한 이 자기 고백적 문장은 다자이 오사무의 취약한 자아를 짐작하게 했다. 물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반성으로 그 삶을 개선하는데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서 나타난 부끄럼은 그 삶에 능동적으로 마주하기보다 그가 바라본 그대로 수용하는 듯해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그의 작품의 대표적 키워드 중 하나가 된 ‘부끄럼’은 세상과 용기 있게 만나를 기 어렵게 했을 것을 생각해 본다. 그의 작품, 곳곳에 묻어나는 회피적이고 의존적인 모습은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도 해본다. 작가의 아바타 같은 ‘요조’가 삶에 대처하는 모습에서 예측할 수 있었다. 작품 인간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가 투영된 자전적 소설이다. 세상 속에서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타인의 시선으로 자기를 평가하며 고통스러워한 그가 어리석게도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 유리 같은
'인간 실격’으로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만났다. 작품에서 인간으로 자격을 잃은 자기 고백적 발언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욕구일 것인데 스스로 이를 부정하는 말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48년에 발표된 ‘인간 실격’은 그 분위기가 우울하고 비관적이라는 첫인상으로 처음부터 그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진하게 느낄 수 있어 더 인정받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물론, 작품 속의 요조에 의한 표현이지만 그의 삶을 살펴보자면 요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아마도 처음 작품으로 만난 그가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같다. 아마도 나에게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부터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도 그의 생각과 정서를 그대로 이해하거나 느끼는데 부족하다. 다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작품에서 그의 생각과 정서를 따라가다 보면 나와 다른 그의 세계를 좀 더 느끼게 되고 내 생각도 깊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에 이를 해결할 방법도 모호함에 따라 과연 우리의 미래,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막연히 그 장래가 밝고 문제없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예측만을 생각하는데 다소 주저하게 된다.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데 경제적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우리의 삶에 경쟁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로 여러 형태의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만약 경쟁이 없는 모두 동일하게 주어지는 환경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냐는 엉뚱한 상상을 하지만 왠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데 자유를 상납한 기계적인 사회를 예측하게 된다. 그럼 과연 이상적인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모두에게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사회는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기억의 전달자’라는 제목은 과학소설을 연상하게 한다. 기억의 전달자 조너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것인지 역설적으로 묻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회구성원을 만족시키는 완벽한 이상적인 사회를 이 소설은 제시한다. 모든 사회구성원의 감정을 없애고 인간의
나쓰메 소세끼의 ‘마음’에서 등장한 인물 중에 가장 그 마음을 이해하는데 어려웠던 인물이 선생님의 친구 K였다. 선생님이 간직한 비밀스러운 이야기의 중심에 있던 K의 죽음. 처음 책을 읽을 땐 단지 K의 죽음을 사랑하는 여인과 더 함께 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에게 사랑이 죽을 만큼 절실했던 것인지에 그 이유에 초점을 두었다. 단지 이상 간에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이해했던 나였다. 그러나 틈틈이 다시 읽게 된 ‘마음’은 K를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했다. ‘K’에 대한 이야기인간의 다양한 마음을 읊은 소설’ 마음’은 인간의 내외면적 불안과 고통은 물론 선악을 아우르는 인간의 본성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마 인간의 바탕을 이야기함으로 오랫동안 관심과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쓴웃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 만큼 이 소설에는 염세적인 색채가 배경을 이루지만 그런데도 아름답고 맑은 생각들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심층에 있는 ‘마음’을 찾아보며 생각하게 하는 철학서 같은 ‘마음’이다. 자기 하숙집에 선생님은 케이를 데리고 온다. 순수한 우정에서 비롯된 배려였을 것이다. 선생님은 완벽하리만큼 모든
요즘, 나쓰메 소세끼의 문학에 빠진 나는 작품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나를 채워가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작품으로 인간의 본성과 성격, 그에 따른 다양한 삶을 조금씩 보는데 스스로 성숙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된다. 물론 내가 이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 삶의 경험으로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껴보게 되는데 앞으로 삶에 적응하는 과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또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문화적 특성과 통합하여 바라보는 역량을 키우는데 그의 작품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그의 작품이다. 이러한 마음에 또다시 그의 작품 ‘그 후’를 선택했다. 일본의 독자적인 문학적 특색을 바랐던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는 그의 전기 문학 중 하나다. 남녀의 삼각관계를 통하여 주인공이 처음의 모습으로부터 점차 달라져 가는 내용을 그린 전근대 배경의 장편 소설이다. 이와 함께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지식인들, 위선적인 지식인들에 대한 풍자가 여기에 있다. 다이스케가 그의 친구 히라오카 쓰네지로를 3년 만에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다이스케는 1900년대 지방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나쓰메 소세끼의 ‘마음’을 무리가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몫이 크다. 먼저 화자인 ‘나’를 통하여 선생님에 대한 궁금증을 독자들에게 전이시킨 것이 신의 한 수다. 여기에 마지막까지 선생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꼭꼭 숨기며 독자들의 시선을 끝까지 모으는 데 무리가 없었다. 나 역시 물이 흘러가듯 마지막 장까지 자연스럽게 읽어 갈 수 있었다. 보일 듯 말듯 어렴풋이 가려진 것을 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최대한 자극한 영특한 소설인 것 같다. 아마도 나쓰메 소세끼는 인간의 마음을 꽤 많이 생각하고 그 자신도 실제 많은 경험을 했던 거 같다. 마치 ‘마음’의 선생님처럼. 선생님이 나(화자)에게 쓴 편지에는 꽁꽁 감추었던 선생님의 과거가 물풍선이 터져 물을 뿜어내듯 드러난다. 소설 ‘마음’은 선생님의 편지로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을 선생님을 통하여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비밀스러운 선생님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으로 집중하게 한다. 선생님이 경험한 마음으로 인간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공 없이 드러낸다. 그러나 평생 부끄럽게 생각한 선생님의 마음은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꾸밈없이 고백하는 듯하여 오히려 선생님에
일본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끼의 문학을 선택하는데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 작가로 1,000엔 지폐에 도안할 만큼 그의 명성은 대단히 견고하다는 것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작품도 인정받아 학자와 작가로서 일석이조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1867년 출생~1916년 사망).국비로 영국 유학 생활 속에서 얻은 자기 생각과 정서를 작품에 담아내어 일본 문학에서 신세계의 문을 열게 했다. 책 표지에 그려진 그의 자태는 기품이 있고 여유로워 보여 그 성장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을 예측했다. 그러나 작가의 삶을 먼저 살펴보아야 그 작품을 더 의미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나름의 생각으로 그의 삶을 살펴본 후, 작품을 단지 로맨스로 감상할 뻔했던 경솔함을 반성했다. 그리고 고전문학을 이해하는데 마음가짐을 재정비하고 긴장감도 느끼며 읽어낸 책이다. 작품을 읽는데 사람에 따라서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는 것이 다양한데 나 또한 새로운 작품을 새로운 시각으로 소화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유로운 시각으로 이 책을 즐기며 읽었다. 그리고 ‘마음’이라는 마음의 양식으로 인간의 관계를
일본 문학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 매력이 무엇이냐 물어본다면 선뜻 이야기하기 어렵다. 겉은 정적이지만 그 내면에 격렬한 소용돌이가 느껴진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적지 않은 일본 문학 작품에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접점이다. 이러한 주관적으로 바라본 일본의 문화적 특성을 보다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을 갖고자 일본 대표적 작가들의 문학을 읽는데 배움의 즐거움을 솔솔 느낀다. 이러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일본의 대표적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의 책 속에 담긴 그의 귀족적인 모습은 그의 작품으로 먼저 손을 뻗게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영국 유학파로 일본에 신문명을 전파한 지성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초창기 작품,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는 1인칭 관점은 그가 서양에서 접한 새로운 관점이 그의 작품에 등장한 것이다. 어쩌면 일본이 새 시대를 맞는 과정에서 새롭고 신선한 문학의 맛을 경험하게 한 작가였기에 더 인정받을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만이 그의 저력을 설명하는데 많이 부족하다. 그의 작품을 읽어 내며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하는데 너무 자연스러움을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주인공 잠자의 삶을 살펴보며 인간의 실존 가치에 대한 생각을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곧 나의 이야기며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삶을 점검할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내 생각은 끝나지 않았다. 잠자의 삶을 이해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삶의 모습을 과연 개인의 책임만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또 다른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삶의 모습은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변화될 것인지 는 동의할 수 없다. 자기 삶의 질을 그 개인에게만 전가한다는 것이 어디서 말하듯 '2%로 부족하다'는 생각과 '그 부족함은‘평등주의’가 일정 기반이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생각을 해본다. 여기서 ‘평등’이란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카프카의 작품으로 접하게 된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고려하면, 인간은 존중되어야 마땅함으로누구나 사회에서 권리나 위세를 획득하는데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의 가치를 논할 수 없다. 그러나 각자의 역량(개인의 능력과 노력)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생각은 특별한 방식의 정당화가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의 삶이 솔직히 버겁다. 더 버거워 질 것을 생각하면 한숨이 난다. 물론 나만 경험하는 생각과 감정은 아니겠지만 ‘변신’을 읽게 된 후, 잠자의 버거움이 나도 우리도 경험하는 것과 그 모양만 다를 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잠자의 삶을 바라보며 느낀 마음을 나와 우리에게 그대로 비추어 보게 된다. '변신'을 읽고 난 뒤,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나의 존재로 꾸려지는 삶에 대한 무게감을 느껴서인지 '존재'와 '삶'이란 단어가 새롭게 느껴진다. 그러다 ‘삶의 토대를 잘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나의 평가적인 사고에 놀라며 ‘혹시 나는 나의 삶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막연한 불안도 느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 애썼던 잠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위해 버둥거리는 나와 우리를 위로해 본다. 더불어 현재 나의 존재에 의해 펼쳐질 나의 삶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카프카의 ‘변신’은 ‘당신이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막연하게 알 것 같지만 선뜻 말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 책으로 책을 읽은 후에 그 여운
고등학생이 되어 생각을 넓고 깊게 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고전문학과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와 근본을 배우는 데 고전문학이 도움이 된다는 누구의 조언이 이 방법을 무작정 선택했던 이유가 된 거 같다. 그 가운데 미술 교과 선생님께 추천받은 카프카의 ‘변신’은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인공과 대화하고 싶은 그런 작품이었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직접 이야기하고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바라는 선택을 하고 있던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자기에게 자유롭지 못했던 주인공의 답답한 마음이 그의 마음인지 나이 마음인지 변별하기 어려웠던 책이다. 태어났으니 내가 태어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내가 사는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그저 막연했다. 자신의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보다 자신으로 현실을 살 수 있게 하는 현실에 바둥거렸던 주인공에게 이것은 사치였을지 모른다. 이 책을 다 읽는 동안 지금 사는 ‘나의 존재 이유’를 지속적으로 나에게 물어봤지만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주인공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한 마리의 딱정벌레로 변한 잠자를 통해 존재
교과과정에서 일본 문학을 본격적으로 접하며 알게 된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 제목에서 ‘참 기괴하다’라는 공통된 느낌이 들게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라쇼몽’으로 사전적으로 외성은 둘러싼 성을 의미하고 그 성의 대문을 ‘나성문’(羅城問) 이라고 한다. 이와 다르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은 현 교토 중심부에 있는 나성문(羅城問)을 가리키는데 이 문은 헤이안 시대(794~1185년)의 것으로 폭풍우로 파괴된 채 황폐하게 남아 여러 기담을 낳고 도적의 소굴이 되었던 곳으로 그 역사적 배경부터 기괴함을 풍긴다. 실직된 무사(주인공), 헤이안 시대를 고려하면 주인에게 버림받은 무사라 해도 무리가 없겠다. 비가 오는 날, 황폐한 라쇼몽을 지나던 직업을 잃은 주인공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지만, 사람으로서 도리를 잃지 않는 도덕적인 사람이 되고자 다짐한다. 그러나 이후에 상황은 그의 다짐을 무색하게 한다. 그는 현실과 이상 간에 내면적 고민을 하고 결국 그는 그 경계를 넘어 버린다. 내가 읽은 ‘꿈의 분석’(프로이드)을 참고하면 자아와 초자아의 싸움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에 현실과 타협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