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은의 생명과학 칼럼] 과학자의 눈으로 문학 작품을 바라보다

문학은 매우 매력적인 학문이다. 더 깊이 탐구할수록 느낄 수 있는 문학의 매력은 수없이 늘어난다. 문학은 또 하나의 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문학가는 자신의 문학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한다. 시인들은 시를 써서 대화를 주고받기도 한다. 누군가는 희망적인 글귀들을 통해 슬픈 감정을 위로받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싸움 소설을 읽음으로써 스트레스를 풀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돌이켜보면, 문학이라는 분야는 완벽하기만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도 명백한 오류인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문학적인 오류가 아닌 과학과 관련된 오류이다.

 

이효석 작가의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작품은 1930년대 강원도 봉평을 배경으로 한 떠돌이 장돌뱅이의 삶에 대한 소설이다. 이 작품의 간략한 내용을 얘기하자면, 허 생원이라는 주인공은 한 충주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동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동이의 착한 심성을 알아챈 허 생원은 그와 친분을 쌓아 같이 대화장으로 가게 된다. 메밀꽃 핀 달밤을 걸으며 허 생원과 동이는 서로의 사연을 주고받던 중, 허 생원은 동이의 사연을 듣고 동이가 자신과 같이 왼손잡이임을 보고 나서 제 아들이 사실 동이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점이 허 생원과 부자 관계에 있음을 확실시하는 역할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왼손잡이도 유전된다는 생각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명백한 오류이다. 좌뇌가 발달한 오른손잡이가 우성유전자이고, 우뇌가 발달한 왼손잡이가 열성유전자이다. 실제로 밝혀진 결과에 따르면, 부모가 둘 다 오른손잡이일 경우 왼손잡이의 발현 확률은 8%가량이다. 부모 중 한 명만 오른손잡이이고 나머지 한 명이 왼손잡이일 경우, 왼손잡이의 발현 확률은 25%이다. 그리고 부모가 둘 다 왼손잡이일 경우, 왼손잡이의 발현 확률은 50%이다. 이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생활 습관이나 주변 환경(가족 등)과 같은 후천적인 외적 요인들도 손잡이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즉, 부모의 손잡이는 자손의 손잡이가 결정되는 확률(가능성)에만 영향을 줄 뿐, 절대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손잡이에 영향을 주는 외적 요인들 또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 속 허 생원처럼 손잡이만을 보고 자신의 자손임을 확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참고: https://namu.wiki/w//왼손잡이)

 

염상섭 작가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라는 작품은 1921년에 발표된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일제강점기 속에 살아가는 지식인인 ‘나’는 심각한 신경과민과 수면장애에 시달린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어 하던 중 친구 H의 권유로 남포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Y와 A를 만나 그들로부터 3층 집을 지었다는 김창억(주인공)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일행과 함께 그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나’는 실제로 그를 본 순간, 중학교 2학년 때 박물 실험실에서 수염 텁석부리 선생이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청개구리의 오장을 끌어내 소리를 질렀던 일을 떠올리며 전율을 느낀다.

 

이 부분을 다시 설명하자면, 선생이 청개구리를 해부하여 오장을 끌어내었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난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으로 완전히 오류인 표현이다. 먼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외부의 온도와 관계없이 체온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특징으로 가지는 정온동물과 외부의 온도에 의하여 체온이 변하는 변온동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 포유류 등은 정온동물이고, 청개구리와 같은 양서류, 또는 어류, 파충류 등은 변온동물이다. 만약 이 작품에서 해부한 생물이 정온동물이었다면, 따뜻한 피를 가지는 온혈동물이기 때문에 외부의 공기에 노출된 내장의 습기가 외부와의 온도 차이로 김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개구리와 같은 변온동물 같은 경우에는 찬피동물이기 때문에, 즉 체내와 외부의 온도 차이가 없어서 아예 김이 날 수가 없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에서 쓰인 표현은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참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842637&cid=63057&categoryId=63057)

 

문학 작품 속 과학적 오류들을 비판하는 것이 과연 마땅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이러한 과학적 오류들로 인해 완벽할 것만 같은 문학이라는 분야에 매력적인 인간미가 부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결코 ‘팩트’들만 전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두 개의 절대적인 단어들로 정의될 수 없는 문학가만의 주관적인 정서, 생각, 가치관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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