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의 독서 칼럼] 나는 나의 삶을 만들어 가고 있다

카프카 '변신'을 읽고 시리즈 2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의 삶이 솔직히 버겁다. 더 버거워 질 것을 생각하면 한숨이 난다. 물론 나만 경험하는 생각과 감정은 아니겠지만 ‘변신’을 읽게 된 후, 잠자의 버거움이 나도 우리도 경험하는 것과 그 모양만 다를 뿐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잠자의 삶을 바라보며 느낀 마음을 나와 우리에게 그대로 비추어 보게 된다.

 

'변신'을 읽고 난 뒤,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나의 존재로 꾸려지는 삶에 대한 무게감을 느껴서인지 '존재'와 '삶'이란 단어가 새롭게 느껴진다. 그러다 ‘삶의 토대를 잘 만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나의 평가적인 사고에 놀라며 ‘혹시 나는 나의 삶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막연한 불안도 느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위해 애썼던 잠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위해 버둥거리는 나와 우리를 위로해 본다. 더불어 현재 나의 존재에 의해 펼쳐질 나의 삶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하는 시간도 가져본다.

 

 

카프카의 ‘변신’은 ‘당신이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막연하게 알 것 같지만 선뜻 말하기 힘든 질문을 던진 책으로 책을 읽은 후에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주인공의 삶을 더듬으며 현재 나의 삶도 바라보게 되는데 이것이 ‘작가 카프카의 의도가 이것이 아닌가’란 생각, 그가 넘긴 공을 받았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방인’의 카뮈와 함께 철학자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카프카가 변신에서 바라본 실존하는 인간의 모습은 참담하다. 주인공 ‘잠자’가 살아간 바로 그 상황을 살펴보자면 아마 카프카 자신이 현실에서 경험한 무력감을 잠자에게 그대로 전이를 시킨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자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주어지는 삶을 살아야 했던 주인공. 그가 주변의 환경과 분리되어 의미가 될 수 없는 상황에 버둥거리는 그의 모습이 처절에 보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동안 잠자 자신의 인생에 그가 쏙 빠져 있는 듯하여 바보 같고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또한 그가 부여한 삶의 의미일 수 있고 신중한 선택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의 편협 된 생각으로 자신의 존재를 가족 안에서 확인하려 했던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가 선택한 삶과 자신을 얼마나 조화롭게 하려 스스로 애써봤는지도 확인하고 싶은 가운데 자기 뜻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현실에서 느꼈을 그의 좌절감이 전해져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하지 못한 나약한 자신에 한 번 좌절하고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가족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데 무력감을 느꼈던 건 아닌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잠자가 우리 주위 어디에서 무력하게 허공을 향해 버둥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시대를 걱정해 본다.

 

본질과 대비되는 현실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실존'은 다른 것에 대체될 수 없는 '지금, 여기'를 사는, 이 현실의 '자기'를 말한다. 현실의 생존방식을 통해 실현해 가는 자기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은 현재의 자기의 생존 방식에 의해서 인간 각자의 본질 (개성)을 생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자, 실존으로 개성을 생성하고 자기가 이를 자각하는 것이 진실한 '실존'이라는 할 것이다.

 

카프카는 인간이 실존하는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은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읽어버린 잠자가 점점 죽어가는 모습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의 가치를 현재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면 잠자가 삶의 가치를 가족에게 의미를 두었다는 것으로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여기서 나의 실존의 가치를 나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고 곧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리해 본다. 그리고 현재 내가 경험하는 삶의 버거움에 의미를 부여함으로 그 무게를 좀 더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며 ‘과연 지금 나의 실존에 의한 삶에 최선을 다해 왔는가?’ 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새삼 부끄러움을 느낀다. 혹시 이 시대를 탓하고 합리화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착각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냉정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잠자가 자기의 희생으로 삶에 대응했던 자세는 나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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