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면서 만약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필자도 역사를 공부하면서 안타깝게 생각되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순간으로 내가 돌아갈 수 있다면 역사를 한번 바꾸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종종 하게 되었다. 좀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가 시간여행을 하고 싶은 첫 순간은 우리 단군 할아버지가 한반도에 터를 잡은 순간이다. 우리 단군 할아버지는 많고 많은 지구 위의 육지 중에 하필이면 이 한반도에 터를 잡으셨을까? 석유 한 방을 안 나오고 산이 국토의 70%라 농사짓기에도 적절하지 않다.중국은 이야기할 것도 없이 일본만 하더라도 남한면적에 15%에 달하는 15,000㎢ 넓이의 간토 평야에서 엄청난 양의 농업 생산물을 확보하여 산업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참고: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56016&cid=40942&categoryId=39945)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다는 호남평야조차도 간토 평야의 1/4 수준인 4,000㎢뿐이 되지 않으니 전근대 사회 경제
"공산주의다",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파괴한다" 등은 인터넷 뉴스 댓글에서 현 정부에 대한 악평을 늘어놓을 때 자주 볼 수 있는 말이다.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고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각 이데올로기의 정확한 이해 없이, 무작정 공산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각 이념의 정확한 개념에 대한 이해와더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도록 칼럼을 적어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최상위 법인 헌법 제1조 1항의 내용이다. 이는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과 함께 우리나라의 기본 틀을 설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조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그 오류는 민주주의의 상대되는 대립 개념을 공산주의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의미는 많은 분이 알고 계시는 것처럼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을 위하여 정치를 행하는 제도 또는 그러한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이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코로나 19상황에서도 여야간의 대립으로 국회 본회의가 개최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인 의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은 매우 슬픈 일이다. 이에 역사적인 관점에서 의회정치에 대해 적어보고자 한다. 의회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정당 정치에서는 복수 정당제를 그 기본으로 한다. 그러한 정당들이 자신의 정책을 국정의 방향으로 삼기 위하여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여러 정치 활동을 한다. 이러한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와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조선 시대에도 붕당정치라는 이름으로 각각의 당파가 의견을 개진하며주도권 쟁탈전을 벌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붕당정치의 시작은 1575년(선조 8년)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림이 사화를 극복하고 정권을 쟁취하였으나 한정된 관직의 수 때문에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이조전랑직을 두고 관료들 간의 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참고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080385&cid=40942&categoryId=31645) 김효원의 동인과 심의겸의 서인으로 양분된 붕당은 동인이 득세하는가 싶더니 동인은 남인과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TOP10'이라는 영상을 봤다(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etakMNS1QQ&t=7s). 현대사 인물들이 많이 있었는데, 개인적인 견해로는 공감되는 인물도 있었고, 공감이 어려운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공통분모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래서 비교적 논란이 적은 전근대사의 인기 있는 인물들을 통해 역사상 인기 있는 정치인들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각종 대중매체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존경하는 인물 혹은 역사상 좋아하는 인물에 관한 조사를 하면,우리나라는 대부분이 국왕을 지냈던 분들이나 정치와 관련된 분들이 대부분이다. 현대의 인물은 아직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아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기에 19세기까지의 인물로만 한정하면 더욱 그러한 경향이 짙어지게 된다. 언제나 인기 혹은 존경의 1, 2위를 차지하는 세종대왕 혹은 이순신 장군도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겠고 대한민국 영토를 가장 넓게 만들었던 광개토대왕이나 정도전, 정몽주 같은 분들도 모두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인기 있는 인물들과 인기가 없는 인물들을
올해 5월 18일,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이 4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5.18 민주화 운동은 4.19 혁명, 6월 민주 항쟁과 함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건이다. 5.18의 40주년을 기념하며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표준 국어 대사전을 보면 “사태”라는 말의 뜻은 비유적으로 사람이나 물건이 한꺼번에 많이 쏟아져 나오는 일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 한 때는 광주 사태라는 말로 불렸다가 이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한 장면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1979년 10.26 사건과 신군부의 12.12 군사반란이 있었던 후 1980년 3월 대학가의 개강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모은 시위가 끊이지 않고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이른바 대학생들의 서울역 회군으로 그 힘이 약해지게 되었으나 광주 지역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지속하였고 신군부가 이를 같은 민족으로는 할 수 없는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하게 된다. 이를 흔히 “광주 사태”라는 이름으로 부르다 1988년 “광주 민주화 운동” 이라는 용어가 나오게된다. 이후“광주 민중 항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올해부터 선거법이 개정되어 만 18세, 즉 일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사람들은 이를 '깜깜이 선거'라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참고 :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200406/100528753/1). 이에 역사 속 정치 발전에는 학생들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에는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 한 구가 발견된다. 이는 마산상고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3월 14일 남원에서 마산으로 갔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었고 차가운 바닷물 때문에 사망 후 한 달여가 지났지만, 시신은 부패하지 않고 다시물 위로 떠오르게 된다. 공중으로 발사하여야 하는 최루탄을 직격으로 발사하여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에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시위하기 시작했고 이는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로 연결되고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화학과 54학번 김왈영 열사의 사망으로(참고 : http://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
2020년 대한민국은 국난이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코로나 19” 사태로 모든 국민이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 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의 개학은 물론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수능 일정까지도 연기가 되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하여 자영업자의 경영 상태 악화 및 여러가지 경제 상황도 최악이 되어가고 있다. 지리학적 특성상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외부의 침략을 받았던 우리나라는 이와 같은 국난의 연속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국난에 대처했던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정치 지도자의 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다. 그 중 중요하다 생각되는 정치인 혹은 지도자의 자세에 대하여 몇 가지 예를 통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번째로 정치 지도자는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여 대처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겪었던 가장 큰 전쟁이라 할 수 있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문제의 파악이나 대비책의 마련이 없이 북으로 도망가기 급급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어려움에 직접 맞서 싸웠기 때문에 우리가 왜의 침략을 극복할 수 있었고 세자 책봉에 이어 왕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 정치 지도자는 문제가 발생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