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것은 가지고 있던 색깔이나 특징 따위가 그대로 있거나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정체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살아있다고 말한다. 살아있음은 정체성대로 살아내기 위해 삶을 책임진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뭔가를 배운다. 살아있다는 것은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뭔가를 끊임없이 학습하는 과정이다.호기심과 경의에 찬 눈빛이 그 존재의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살암’ 즉, 살아있는 것들 중에 으뜸을 의미한다. 나는 살아가고 있는 만물 중에 낯선 외부에 경이롭고, 호기심 많은 ‘사람’인 것이다. 그런 나는 살아있나?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질문이 없는 존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떠한 익숙함, 패턴, 굴레 속에서 질문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공부(工夫)’다. 한자로 ‘지아비가 되는 노력’을 뜻한다. 어쩌면 공부는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 아닐까. 자신만의 정체성대로 삶을 책임지며 몸부림으로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정의를 기준으로 본다면 현시대는 누구나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살아있는
“What you do matters.”-Holocaust memorial Museum Holocaust Memorial Museum front 워싱턴의 차가운 공기만큼이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에 있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사진 속 불타고 있는 시체들은 나를 입구 앞에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그 순간 ‘What you do matters.’ 문구가 나를 붙잡았다. 고통스럽기에 더 기억해야 한다고, 더 행동해야한다고 외쳤다. 그렇게 나는 박물관에 첫 발을 디뎠다. 내부의 모든 사물, 영상, 사진들은 ‘기억’과 ‘책임’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다. 무엇을 위해 기억해야 하며, 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기억은 다시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시 생각할 때 비로소 질문하게 되고, 다르게 보인다. 나치도 ‘생각’이라는 부분으로 사람들을 세뇌시켰던 것과 같이 생각은 그 어떠한 수단보다 강하다. 나치는 라디오, 교육 등으로 자신의 사고를 사람들에게 세뇌시켰다. 어린 아이들은 교육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닌, 생각을 주입 당했다. 어른들에게는 라디오를 나눠줌으로서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세뇌는 자신의 정체성과, 과거를 기억할 수
한껏 목청을 뽑던 수탉과 꼬꼬댁거리는 암탉은 농장의 평화롭고 한가로운 풍경을 상징했다. 병아리들을 데리고 다니던 암탉은 모성애의 아름다움이었다. 이렇게 한가롭고 평화로운 농장을 상징했던 닭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이윤을 위한 착취의 농장이 되었다. 조류독감사건(AI)에 이어 이번에는 살충제 계란 파동이 우리를 혼란으로 이끌었다. 농장주들은 피프로닐 성분이 들어있는 살충제를 닭에 몸에 생기는 벼룩, 진드기 퇴치를 위해 살포했다. 피프로닐 성분은 소, 돼지, 닭, 그리고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되는 성분이었다. 본래 닭은 ‘모래 목욕’을 통해 스스로 청결을 유지한다. 또한, 닭 자체가 면역력 키워지면 닭에게 좋지 않은 살충제를 뿌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냅킨 1장 정도의 밀집 사육장에서 키워온 닭들은 면역력이 상실되었다. 밀집되어 있는 공간에서 면역력이 약한 닭의 몸에 있는 진드기, 벼룩들은 쉽게 번식했다. 그리고 살충제를 살포했다. 언제부터 우리는 닭들을 밀집 사육장 안으로 집어 넣어버린 걸까? 닭은 기계가 되었다. 아니, 사람들이 닭을 기계로 만들었다. 60년대 초부터 더 많은 달걀을 생산하고자 닭을 밀집 사육장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비자 욕구는 실
주위를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나를 둘러싼 주위에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 것도, 또 그것을 고개 들어 바라보는 순간도 아름답다. 고개를 들지 않고 살면 우리는 아름다움을 잃게 된다. 봄도 볼 수 없고, 나뭇가지마다 초록 잎사귀가 올라오는 것도, 뛰어노는 아이들도 볼 수 없다. 고개를 들지 않으면 내가 걸어온 발자취와 길 사이의 함께 가주었던 잎사귀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꽃들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아에만 충실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하며, 당연한 것들에 순응하는 이는 고개를 들을 수 없다.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나를 책이 깨웠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인생을 그린 이 책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내가 그들을 향해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며, 당연한 것들에 질문할 때 그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고, 나에게만 집중하며,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책은 이러한 우리의 삶을 점검하게 만든다.그들은 암흑 같았지만 밝았다. 가난의 끝을 궁핍의 최악을 달리고 있었지만, 밝고, 순진했고, 순수했다. 그들 안에 희망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벗어날
돈이란 무엇인가? 사전은 ‘사물의 가치를 나타내며, 상품의 교환을 매개하고, 재산 축적의 대상으로도 사용하는 물건’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돈은 흔히 ‘돌고 도는 것’이라고 말한다. 돈은 흐르는 하나의 ‘에너지’와 같다. 에너지라는 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이 에너지가 비교로 흐른다면, 돈(에너지)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으로 흘러간다면, 돈(에너지)은 사물들과 사람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자신이 돈을 어떻게 보고, 쓰고, 가지냐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 나의 의식, 우리의 의식에 따라서 돈의 흐름은 매번 바뀌게 되어있다.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빈자와 부자의 간격은 점점 멀어지게 될 것이다. 부자와 빈자의 이야기 그리고 돈의 흐름을 아이러니하게 써나간 책을 소개하고 싶다.‘오즈의 마법사’ 이 책은 캔자스의 시골 마을에 숙부, 숙모와 살다가 토네이도에 휩쓸려 마법의 대륙 오즈에 떨어진 도로시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펼치는 누구나 아는 모험 이야기이다. 이 책이 ‘돈’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이들을 위한 책 같던 ‘오즈의 마법사’는 돈의 현실을 반영한 다른 얼굴
감각적인 기쁨을 주는 대상의 특성으로, 마음을 끌어당기는 조화(調和, harmony)의 상태. 이를 우리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미’를 중요시하는 기준이 되었을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내면의 조화가 아닌, 타인이 원하는 아름다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원한다면 서슴지 않고, 나다움을 포기하고 목 졸라 버리고 만다. 아름다움의 기준과 정의가 언제부터인가 왜곡되고 있었다. 왜곡된 정의로 인해 많은 사람이 방황하며 살고 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고, 나다운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 모습이 되어버렸다. 타인의 칭찬이 단지 좋아서, 그것이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아닌 거울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나보다 세상의 왜곡된 ‘아름다움’의 기준과 정의 때문에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장애인’들이다.Disabled, Useless, Worn-out이 의미들은 장애인들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필요 없는 존재이며, 고장 난 존재라는 것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하나 때문에 고장 났다고 말하고, 사회에서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과연 정상적인 사
우리는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무언가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일어나서 점검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잠잘 때까지도 손을 놓지 못한다. 이것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더 아파져만 간다. 청소년 3명 중 1명이 이것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에 의한 사고는 계속해서 늘어나가기만 한다.그렇다.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에 의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몸비(스마트폰+좀비)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스마트폰의 폐해는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도, 진정한 소통을 할 수도 없다. 모두 스마트폰 속 자신의 세상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가족들이 함께 TV를 보는 시간에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다. 개인을 위한 공간은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소통할 방법(SNS)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疏通)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소통이 어려워지면서 ‘공동체’라는 단어는 점점 어색해져만 갔다. 스마트폰으로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더는 주위에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소통이 어려워지고, 아름다움이 사라져 갈수록 우리는 더 아파져 갔다. 이러한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특정한 죄가 있는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또는 자신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결정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2014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낙태율을 최상위로 기록하며, 전체 신생아 중 36%에 달하는 16만 9000여 명이 낙태(임신중절수술)로 태어나지 못했다. “태아는 생명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지도 못한 채 그들은 태아들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덤불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모르는 존재에 대해 총을 쏘아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태아는 사람인가. 태아가 생명이냐는 논란의 쟁점은 반복되고 있다. 과학, 종교, 시대 또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다른 생명에 대한 논리를 펴고 있다.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낙태’를 보면 “수정 직후부터 영혼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낙태는 살인이다”에서부터 “태아는 독립적 생존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모체에 기생하는 모체기관의 조직의 일부 또는 모체를 이용하여 자기 증식하는 기생체일 뿐(fetal parasitism)이므로 낙태할 권리는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까지 각자 처지에 따라 폭넓게
마치 점묘화와 같이 사람 한명 한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회. 점 하나라도 빠지면 한 폭의 그림이 아닌 만큼, 점 자체가 중요하다. 점 하나의 색과 채도가 있으므로 그림이 존재한다. 이는 사람 한명 한명이 있으므로 사회가 존재한다는 명제로 성립된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이 태어나고, 이동하고, 죽는 현상이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이미 어쩌면 많이 들었을 수도 있다. 고령화와 저출산이라는 실타래와 같은 문제들 말이다. 나이를 먹어 가는 인구가 늘어가고, 태어나는 인구가 줄어간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본질적인 인구 문제다. 인구의 수가 뭐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고령화와 저출산이 결합한 사회가 우리의 미래다. 그래서인지 ‘이대로 가다간 20XX년에 한국이 없어진다.'는 식의 묵시록 같은 예언만 난무하며, 객관적인 자료들과 온갖 통계들은 암울할 미래에 대해서 선언한다. 저출산 문제는 국가적 위기다. 우리나라는 지난 40년간 출산율이 지속해서 감소해왔고 특히 2002년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출산율이 하락했
누군가는 이야기한다.리더는 6가지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대중에 대한 전달자로서의 능숙도, 조직 능력, 정치적 기술, 비전, 인지의 유형, 그리고 감정적 지능을 말한다. 이러한 리더십의 요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딜까. 바로 정치다. 정치에서 효율적인 정치적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은 대통령을 연구함으로써 리더십의 자질에 대해서 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여섯 가지 자질은 어느 한 사람에게 완전하게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여섯 가지 자질 중 가장 중요한 자질들은 ‘대중에 대한 전달자로서의 능숙도’와 ‘감정적 지능’이었다. 이 말은 곧 백성들을 알고,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사는 우리. 가장 중요한 것이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곳은 ‘민주’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국민에 대한 탄력성을 겸비하라는 것이다.‘의원내각제’는 국민에 대한 탄력성이 뛰어난 제도라 일컫는다. 앞서 말한 리더의 자질 중 ‘대중에 대한 전달자로서의 능숙도’와 ‘감정적 지능’을 깨울 수밖에 없는 제도다. ‘의원내각제’는 국민에 의해서 언제나 내각이
나의 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 내가 잘 살길 바라고, 내가 복 받는 것. 복 받고, 나라도 잘살다가 죽고 싶었던 과거의 내 바람. 나는 이 바람이 나에게만 바래지고 있는 줄 알았다. 주위를 둘러봄과 동시에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많은 사람이, ‘샤먼’으로 오염된 대통령이 ‘쾌락’과 ‘기복’, 그리고 ‘욕망’을 향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샤먼’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지만, 실제로 ‘샤먼’ 적 사고와 행위를 하고 있었다. 나에게 샤먼은 ‘종교 샤머니즘에서, 신령ㆍ정령ㆍ사령(死靈) 따위와 영적으로 교류하는 능력을 갖추며, 예언ㆍ치병(治病)ㆍ악마 퇴치ㆍ공수 따위의 행위를 하는 사람’의 존재였다. ‘샤먼’은 ‘Shamus’ 무당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무당과 ‘나’ 자체는 아무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산해경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산해경에서 나온 온갖 가지 상상력의 동물들과 신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샤먼’을 위한 것이었다. 상상력의 힘은 어마어마했고, 그 구체성에 놀라고 말았다. 남쪽에서부터 서쪽, 북쪽, 동쪽, 그리고 중으로 각 지역의 기이한 사물, 인간, 신들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고대인들의 주술적 사고방식을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