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없는 존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떠한 익숙함, 패턴, 굴레 속에서 질문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공부(工夫)’다. 한자로 ‘지아비가 되는 노력’을 뜻한다. 어쩌면 공부는 삶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 아닐까. 자신만의 정체성대로 삶을 책임지며 몸부림으로 만들어나간다. 이러한 정의를 기준으로 본다면 현시대는 누구나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살아있는 것 같아 보여도 속은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무엇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없다. 개념에 대한 정의를 모른 채 목표를 위해서 과정을 이끌어나가는 이들은 그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오직 대학을 위해, 취업을 위해 공부를 한다. 대학, 토익, 취업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룰 수 있는 하나의 ‘수단’, ‘도구’, ‘방법’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부터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목표(본질)가 아닌 방법에 집중하게 되었다.
무엇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 자유로운 삶? 행복함? 건강? 에피로쿠스는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연습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살암’의 정체성으로 잘 살고, 잘 죽어간다는 것은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나아가며, 책임진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하건, 거침없이 제 갈 길을 갈 수 있는 것 말이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장애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요건들을 충족하려다가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장애물을 피하는 것보다 먼저다. 거침없이 내가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에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해야 한다. 질문을 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이는 결국 ‘나’다운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생물은 자기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숨을 쉴 때 우리는 나머지 생물들과 연결된다.” -린 마굴리스, [생명이란 무엇인가?]
잘 살고, 잘 죽기 위해 우리는 살아있어야 한다. 공부는 우리가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생명으로서 생명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함께 그 앎을 공유하지 않으면 이는 살아있음이 아니다. 앎은 한 주체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함께함의 산물이다. 나의 정체성대로 살아낼 때 그 생명의 기운이 타인들에게 전파되는 것이다. 함께 공부를 하고, 나누어 줄 때 서로에게 더 배울 수 있다.
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때 이러한 현상과의 접촉이 나를 공부하게 할 것이다. 공부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만이 아닌 호수에서 노을에 부스러지는 빛들, 가을이면 떨어지는 낙엽들의 소리를 들을 때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살아 숨쉬고, 자신의 기능과 특성을 하듯이 모두가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