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의 가요칼럼 1] 국내 힙합의 대중화

할렘가에서 태어나 한국 인기차트를 장악하다

종종 음악 차트를 둘러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온갖 편견과 오해에 둘러싸여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지 못하던 힙합 장르의 음악이 아무렇지 않게 순위권에 들어있는 탓이다. 그 뿐만 아니다. 카페를 가도, 식당을 가도, 심지어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달달한 사랑 노래만큼이나 자주 들리는 곡은 다름 아닌 힙합이다.


힙합이 우리나라 대중문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은 5년도 안 된 일이다. 2012년 여름, '힙합'으로 대동단결한 래퍼들이 팀을 꾸려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쇼미더머니1>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만 해도 힙합은 대중들에게 등한시의 대상이었다. 그들만의 음악. 즉, 래퍼들만의 음악이었으며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듣기 어려운 장르라는 이미지가 강하게 박혀있었다. 때문에 <쇼미더머니1>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할렘가 흑인들의 음악이 한국인의 정서에 맞을까'라던 힙합 팬들의 우려에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이라도 하듯 <쇼미더머니1>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매년 새로운 라인업으로 대중들을 찾아오는 인기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 되었다. 힙합이 쭈뼛쭈뼛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접근한 것이 아니다. 새로운 래퍼가 등장하고 새로운 힙합곡이 나올 때마다 한국인의 정서가 힙합에 맞춰가고 있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힙합의 대중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힙합의 탄생


사실 힙합의 본고장은 한국이 아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라서 힙합의 본래 뜻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힙합은 음악의 성격이나 장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었다. '엉덩이를 흔들다'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의 문화 현상을 일컫는 단어였다.


힙합은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문화'라고 평가받는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힙합이 생겨난 당시 미국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미국 사회에서는 인종 평등을 위해 인권운동가들이 많은 노력을 펼치고 있었으나 백인과 흑인의 대립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1970년대 후반 뉴욕 맨해튼 부근의 브롱스와 할렘 지역은 백인들의 핍박을 피해 살 곳을 찾아온 많은 흑인과 이민자의 후손들이 모여 빈민가가 되어 있었다. 빈민가 사람들은 긴 시간을 인종 차별에 시달렸으며 가난에 허덕였다.


풍요롭지 못한 생활 속에서 느낀 사회적 박탈감을 느껴 온 그들은 마침내 이것을 감정과 생각으로 표출하였고, 힙합은 빈민가의 흑인들과 스페인계 청소년들에 의해 형성된 문화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이어져 1980년대 이후 힙합이라는 거대한 문화 현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카니예 웨스트 (Kanye West)


역사적 배경만 보아도 힙합이 우리 정서에 맞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평등하고 민주적으로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별과 억압에 분노하고 절규하는 그들의 음악을 어떻게 모두 이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국으로 넘어온 힙합은 인종차별주의자에 대한 비난을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난으로, 인종으로 억압받는 좌절감을 먹고 살기 힘든 현실에 대한 무력감으로 돌리며 그 사회와 시대에 맞게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샀다.


살아온 환경, 사회적 배경은 다르지만, 누구나 살다 보면 힘들고 지친 날이 있고, 응어리가 맺혀 서러운 날이 있고, 억울하고 분한 날이 있게 마련이다. 저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흔하디 흔한 비트에 그 설움을 토해내는 힙합의 특징이 정서와 상관없이 우리의 마음을 이끈 게 아닐까 싶다.



◈ 한국에 들어온 힙합


한국에 들어온 힙합이 처음부터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한국 힙합계는 마니아층 수준의 팬들과 몇몇 래퍼들이 겨우겨우 이끄는 단계였다. 그러나 그 현상이 안정적이고 꾸준히 이어지면서 힙합을 찾는 계층이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극소수의 인원으로 꾸려진 몇몇 국내 힙합 레이블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래퍼를 모으며 나름 힙합씬에서는 세력을 넓혀나간 것이다. 대표적으로 2006년 결성된 '아메바컬쳐(Amoeba Culture)', 2009년 결성된 '저스트 뮤직(Just Music)', 2010년 결성된 '하이라이트 레코즈(Hi-Lite Records)'. 그 외에도 '일리네어(1llionaire)', '브랜뉴뮤직', 'AOMG' 등의 힙합 레이블이 있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이미 힙합씬에서 주목받던 래퍼들이 레이블을 결성한 뒤 꾸준한 작업으로 입지를 다져놓은 상태에서 오직 '힙합'만을 취급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 <쇼미더머니1>, 출처 엠넷(Mnet)


이는 우리나라 힙합씬이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얼마나 단단하게, 또 체계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쇼미더머니>가 흥행하며 힙합에 눈을 뜬 대중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레이블을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힙합 음악을 접하며 '힙합'은 더는 낯설지 않은 장르가 될 수 있었다.


◈ 힙합 하는 아이돌


현재 우리나라 가요계는 아이돌 그룹이 주름 잡고 있다. 아이돌 그룹은 대중성을 노린 음악을 추구하기 때문에 후킹 효과(반복되는 짧고 감각적인 멜로디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따라부르게 되는 현상)가 강조된 훅송이 대부분이다. 랩, 그라피티, 브레이크댄스, 디제잉으로 구성된 힙합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기존의 아이돌 음악은 절대 힙합과 어우러질 수 없는 상태였다. 2007년 '원더걸스'가 발표한 'Tell Me' 등을 비롯한 댄스음악들이 모두 전형적인 훅송이었다. 훅송은 음악 형식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극단적으로 후렴구를 강조하는 서사구조를 가졌다. 멜로디의 경우 최대한 단순한 선율을 사용하여 이를 수십 회 반복하는 후킹 효과를 낸다.


반면 힙합은 비트와 가사로 구성되며 멜로디보다는 리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훅송과 비교했을 때 물과 기름처럼 절대 섞일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아이돌 음악에서 찾아볼 수 있는 힙합의 성격이라고는 고작해야 빠른 비트에 맞춰 노래하는 랩 파트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전문적인 래퍼가 아닌 스타시스템에 맞춰진 보컬 트레이닝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돌이 담당했기 때문에 어설픈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힙합의 대중화가 진행됨에 따라 언더그라운드와 오버그라운드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절대 섞일 수 없을 것만 같던 아이돌 그룹과 힙합이 결합하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훅송의 구성에 랩을 끼워 맞추던 아이돌 음악을 타파하고 '힙합'이라는 뚜렷한 음악색을 가진 그룹이 등장한 것이다.


△ 힙합 아이돌 그룹 '블락비', 출처 : 세븐시즌스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래퍼 '지코'가 리더이자 메인 래퍼로, '박경'이 리드 래퍼로 있는 아이돌 그룹 '블락비'가 2012년 4월 데뷔하였다. '힙합 하는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에 대중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한 걸음 뒤에서 '블락비'의 음악을 지켜보며 긴가민가하던 대중들에게 '난리나' 곡이 히트를 치며 '힙합하는 아이돌'은 한결 친근한 이미지로 전환되었다. 힙합이 막 떠오르는 시기였으나 아직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흘러가던 가요계에서 힙합을 장르로 내세운 아이돌의 등장은 성공적이었다.


△ 멜론(Melon) 음원차트 캡처


이후로 기존의 아이돌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랩과 힙한 컨셉을 꾸준히 어필하며 '닐리리맘보', 'Very Good' 등의 히트곡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최근 신곡 'Yesterday'로 각종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며 다시 한 번 '힙합 하는 아이돌'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블락비의 흥행에 자극을 받기라도 한 듯 그뒤로 줄을 지어 '힙합 하는 아이돌'이 쏟아져나왔다. '방탄소년단', '몬스타엑스' 등등 한동안 랩, 힙합이라는 장르를 내건 아이돌그룹이 대거 등장하였다.


◈ 힙합의 대중화


힙합을 다루는 TV 프로그램과 힙합을 하는 아이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힙합 문화에 노출되면서 힙합은 점점 대중화의 성공에 가까워졌다. 여기에 보란 듯이 새로운 방송 프로그램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힙합의 민족>, <언프리티랩스타>, 그리고 오는 2월 10일 첫 방송이 예정된 <고등래퍼>까지.


프로그램 종류가 다양해지자 빛을 못받고 있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의 방송 진출 기회도 많아졌다. 방송을 통해 실력을 입증하고 이름을 알리면서 레이블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실력은 탄탄하지만. 무대가 없어 언더그라운드만 전전하던 신인 래퍼들이 속속 등장하여 힙합씬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서바이벌 형식의 프로그램에서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수준 높은 랩을 구사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곡들이 대중들 사이로 퍼지며 힙합은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했다.

△ <우연히 봄> 앨범 / <견딜만해> 앨범,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이제는 아이돌 그룹의 이름만큼이나 친숙하게 여겨지는 래퍼들의 이름, 그리고 힙합 레이블. 또한, 아이돌 그룹 노래만큼이나 자주 들리는 힙합 음악. 음원 인기차트에, 노래방 인기차트에 보이는 것이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힙합은 완전하게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최근에는 힙합 콘서트, 힙합 페스티벌과 같이 래퍼들의 단독 무대가 주어지는 크고 작은 힙합 공연이 열린다. 또한, 힙합의 대중화 됨에 따라 규모가 커진 힙합 레이블이 콘서트를 주최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힙합을 패션과 스타일로 승화시켜 유행을 선도하기도 한다. 대중음악의 대열에 들기가 무섭게 이제는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 정도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성장 속도이다.


△ K-HIPHOP 포스터


제대로 된 음악도 아닌 추상적인 문화현상일 뿐이었던 힙합이 할렘가를 발판으로 하여, 힙합의 정서와 전혀 상반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 또한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대중음악의 한 장르가 되기까지는 많은 래퍼의 노력이 있었다.


이는 힙합이 우리의 문화에 막무가내로 비집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힙합의 언어와 감정은 격앙된 면이 있지만 막 나가지 않는다. 힙합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반발심에 가득 찬 적대적인 음악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곧 그 가사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국내에 들어온 힙합은 그 나름대로 한국인의 눈치를 보며 편을 들어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둡고 공격적인 길거리 음악, 제대로 배우고 오랜 기간 연습해야만 할 수 있는 음악. 어찌 보면 편견도 오해도 아닌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는 언제나 변화하고 성장한다. 힙합은 더 이상 음악이라는 예술의 한 분류가 아니다. 새 문화를 창조해내고 음악을 선도하며, 날카롭지만 솔직담백한 가사 속에 우리의 시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아직도 힙합의 관문에 발을 디디지 못했다면, 힙합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보는 것이 어떨까?



칼럼 소개: 할렘가에서 시작되어 한국 대중화에 성공하기까지 과정을 알면 '힙합'을 향한 편협된 시각을 버리고 대중문화의 한 장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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