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윤의 영화 칼럼] 이단아 크루엘라가 매력적인 이유

 

최근 개봉한 영화 <크루엘라>는 <101마리 달마시안>이라는 이름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크루엘라는 <101마리 달마시안>에 등장하는 악역 크루엘라를 재해석한 인물이다. 원작 애니메이션에서는 부도덕하고 사악하기만 한 인물이었던 크루엘라는 재해석을 거치며 매력적인 캐릭터로 탄생했다. 영화 <크루엘라>는 는 화려한 패션과 영상미로 큰 화제가 되었지만, <크루엘라>는 시각적인 즐거움 외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우선 영화 초반, 크루엘라의 유년기가 드러난다. 주인공 크루엘라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같은 학교 남자아이들의 괴롭힘에 적극적으로 대항해 싸우다가 퇴학 직전 자퇴하게 된다. 그러나 크루엘라의 어머니는 크루엘라를 혼내지 않는다.

 

크루엘라의 시간적 배경은 1940년대에서 1960년대 즈음으로,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지금보다 더 권위적이고 관습적이었을 것이다. 크루엘라의 성격상 학교의 비합리적인 교칙까지 모두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 같아 크루엘라가 학교를 자퇴한 것은 예상 가능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크루엘라가 학교에서 ‘말썽꾸러기’ 취급을 받아도 그녀의 어머니가 크루엘라를 혼내지 않고 오히려 크루엘라에게 ‘넌 특별한 아이니까’라고 말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를 자퇴하거나 학교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에게 편견 어린 시선이 따라붙곤 한다. 영화 <크루엘라>는 학교, 즉 관습에 수긍하지 않은 크루엘라와 그녀를 지지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며 고리타분한 관습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둘째로, 영화에서 크루엘라의 가족은 여러 형태를 가지고 있다. 크루엘라는 친모에게 버려졌지만 입양되어 양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크루엘라가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후 만든 새로운 가족은 도둑질하는 어린 소년들이었다. 크루엘라가 복수를 계획하자 두 도둑은 내키지 않으면서도 크루엘라를 가족으로 여기고 도와준다. 이기적인 크루엘라의 태도에 상처를 받아도 크루엘라의 이야기와 사과를 듣고 다시 크루엘라를 돕는 두 도둑이 보여주는 크루엘라와의 돈독한 유대관계가 영화 내내 잘 드러나 흐뭇하다.

 

영화 <크루엘라>는 크루엘라가 가진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통해 혈연관계만이 가족의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흔히 가족이라고 하면 친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의 여러 형태 중 한 가지일 뿐이다. 크루엘라처럼 입양되거나, 편부모 가정이거나, 혹은 부모와 자식, 부부의 형태로 구성되지 않았을지라도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이 많이 존재한다. 또 크루엘라는 친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가족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정으로 친부모, 혹은 친형제와 사이가 좋지 않아 가족의 연을 끊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한다. 영화에서는 크루엘라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를 굳이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주류적인 가족의 모습을 지키지 않는 것이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크루엘라는 악역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영화 <크루엘라>에서도 크루엘라는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도둑들에게 명령하거나, 남작 부인을 과격한 방식으로 골탕 먹이거나, 다른 사람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원작과 달리 강아지를 사랑한다는 설정을 부여했지만, 크루엘라는 선하고 이타적인 디즈니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크루엘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악역이 되었다.

 

왜 크루엘라의 악역 같은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가? 나는 사람들이 권선징악의 뻔한 구도에 질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인간은 아주 입체적인 존재이며, 완전히 나쁜 사람도, 완전히 착한 사람도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마냥 나쁘게만 보였던 악역의 인간적인 사정, 마냥 착하게만 보였던 주인공의 이기적인 모습이 더 흥미롭고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이 고달파지면서 사람들에게 마냥 베풀고 희망적으로만 생각하는 착한 주인공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남들을 배려하지 못했던 순간, 혹은 권선징악은 실현되지 않음을 인지하고 ‘착한 사람’을 적당히 포기하게 된 순간에, 사람들은 ‘착한 주인공’ 따위는 영화나 소설 속에나 나오는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끝없는 경쟁, 심화된 빈부격차, 때로는 도덕보다 돈에 더 높은 가치가 매겨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적당히 이기적인 악역 캐릭터를 보면서 더 공감하고 더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이다. 크루엘라는 복수를 진행하는 거침없는 추진력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통쾌하게 했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나는 크루엘라라는 악역을 어떻게 재해석하여 선함을 드러냈을지 궁금하였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굳이 주인공에게 도덕적이고 선하다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아도 충분히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루엘라는 영화에서 무차별적으로 잔인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크루엘라는 그저 관습을 거부하고 적절히 이익을 추구하는, 1900년대 중반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이단아’로 보일 법한 인물이다. 영화 내내 크루엘라는 전통에 순응하지 않아도, 사회 주류 집단의 문법을 따르지 않아도, 필요할 때는 이기적으로 굴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영화 속 크루엘라의 행동이 과격하긴 하지만 그녀의 모습에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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