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종의 사회 칼럼] 정체성 정치에 대한 고찰

후쿠야마를 넘어 랑시에르로

정체성 정치란, "공유되는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배타적인 정치 동맹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자 사상"1을 의미한다. 정체성 정치는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특정 집단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모든 연대를 거부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해당 사회적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연대를 구한다. 이 연대는 고전적인 계급 의식과는 다른 형태다. 순수히 타자에 대한 거부로 뭉친 의식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체성 정치는 차별에 맞서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특히, 젠더와 인종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도 최근에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존중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주목할만 하다. 그는 이 책에서 '정체성 정치'를 분석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인권 운동에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종교로까지 정체성 정치의 영역을 확대한다.2하지만 필자는 여기서는 보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민족과 종교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를 논의의 대상에서 거부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위한 운동의 방법으로써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

 

후쿠야마는 모든 인간은 "대등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벌어지는 일련의 정체성 정치 운동은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정체성 정치가 "이미 패배한 정체성으로 회귀"3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의 해법은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더 통합적이고 넓은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은 이런 틀에서만 전통적인 정치의 회귀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후쿠야마의 관점을 빌려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 정체성 정치는 분명히 사회적 소수자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일례로 페미니즘 운동은 여성에 대한 차별적 대우를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정체성 정치는 무한한 대립에서 근본적인 해결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체성 정치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절대적인 적대감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투적인 정체성 정치가 가장 첨예하게 부딛치는 곳은 바로 정체성이 권력과 마주하는 곳이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권력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권력의 지평은 정체성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걸쳐 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고전적인 계급의 변증법을 방해한다. 후쿠야마가 주장하는 국가적 차원의 건전한 정체성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후쿠야마의 주장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위계 질서는 당연하며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데는 효과적이지만, 여러 정체성 정치들이 활발하게 부딛치는 자본주의의 지평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다. 

 

이 시점에서 자크 랑시에르는 후쿠야마의 한계를 뛰어넘는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랑시에르는 사회 운동을 "사회 질서가 그들에게 준 정체성인 사회학적 정체성을 기각함으로써 투사로서의 정체성을 발견"4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사회는 정체성들을 규정한다. 이는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성적 정체성과 지향, 인종과 민족, 이는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다. 

 

이를 걷어내고 우리는 자본주의의 지평을 발견해야 한다. 물론, 이 주장은 소수자의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점은 결코 아니다. 다양성과 권리의 확대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과두정 이상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수자의 권리는 진보만이 떠앉아야 할 과제가 아니다. 권리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이다. 대등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지표가 된다는 생각은 어불상설이다. 미국 공화당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테디우스 스티븐스(Theadeus Stevens)는 경제적으로는 우파였지만, 노예제 폐지에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는 노예제 폐지에 대한 링컨의 의지가 약하다고 비판할 정도였다.

 

진보가 떠앉아야 할 과제는 정체성의 허상을 뛰어넘어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무한하다.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히 많은 페미니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정치에 펼쳐진 자본주의의 지평은 언제나, 어디서나 균일하며,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 동안 그러할 것이다.

 

자유와 민주 없이 사회주의의 원류는 실현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에 따라 발전된다.

 

<프랑크푸르트 선언> 중

 

참고문헌:

인용: https://ko.wikipedia.org/wiki/정체성_정치

참고: <존중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2020, 프란시스 후쿠야마,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88947545815

인용: Ibid, p. 252

4 인용: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2008, 자크 랑시에르, p. 126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barcode=9788987671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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