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주어진 삶을 감당하는 '나'

바뀌지 않는 현실 속에서, 맡겨진 수레를 이끄는 삶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교육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자아를 형성하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대표적인 교육으로 '소극적 교육'과 '적극적 교육'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은 과도한 적극적 교육의 폐해를 고발하고, 소극적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주인공 '한스'는 슈바르츠발트의 작은 마을에 사는 남자아이다. 출세의 기회가 적은 이 마을에서는 한스가 신학교(수도원)에 입학해 목사가 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때문에 한스는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둘씩 잃어간다. 어른들의 기대는 한스를 점점 더 옥죄어가고, 한스는 어른들의 욕심에 맞춰진 기계가 되어간다. 권위적인 아버지, 모순적인 교장 선생님, 성경을 거짓이라 말하는 목사…. 이들과는 다른 깨어있는 어른도 있었다. 바로 구둣방 아저씨다. 그는 유일하게 한스 그 자체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한스는 아직 다른 어른들의 적극적 교육 방식에 얽매여 있을 때라 구둣방 아저씨가 그리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어쩌면 작가 '헤르만 헤세'가 기독교인이었기에, 비성경적인 목사와 신실한 종교인인 구둣방 아저씨의 모습을 대비 시켜 이미 긍정적인 인물과 부정적인 인물을 표시해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한스는 결국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주 시험에서 2등으로 합격한다. 어쩌면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스는 수도원에서 모범생 이미지로 적응해간다. 선생님들의 총애와 교장 선생님의 신임을 받지만, 새로운 친구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학교생활은 바뀌어 간다. 하일너는 저항적인 친구였다. 학교의 규율에 잘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뜻을 따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진 아이였다. 그렇다고 하일너가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문학 천재였지만, 사회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문제아로 취급했다. 한스에게 그는 신기한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에 맞춰 변화한다. 고단하고 억제되었던 한스에게 하일너의 계몽적인 모습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매개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일너가 학교를 떠나면서, 한스는 혼자가 된다.

 

한스는 결국 신경쇠약 진단을 받고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는 지쳤다. 삶의 즐거움과 목표를 잃어버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의 너무 이른, 그리고 험난했던 여정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너무나 가혹하고 단호한 여정이었다. 자신을 잃어버린 한스에게 무엇이 가능했겠는가? 효과 없는 교육 제도와 지나친 어른들의 교육 방식은 그를 망가뜨렸다. 목표 없이, 의지도, 희망도 없이 시계 견습공으로서의 무료한 삶을 근근이 이어나가던 한스는 신학교에 있을 적에 연못에 빠져 죽었던 힌딩어처럼, 그것이 그의 의지였는지 우발적인 사고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강물에 빠져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과도한 적극적 교육의 비극적인 결말이자 사회에 던지는 청소년의 포효였으리라.

 

'수레바퀴'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작중의 교장 선생님의 말에서 미루어 볼 때,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아니, 현대인들에게 주는 압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극적 교육이 온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고유의 가치를 갖고 있는 훌륭한 교육법이다. 하지만 사회는 이를 오용·남용하고 있다. 이를 감당하는 우리들은 고통스럽지만 바꿀 수 없기에,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내가 무엇을 짊어질 것이며, 어떻게 감당하고 이겨낼 것인지를 성찰을 통해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만의 수레를 끌어야 한다.

 

나의 수레는 무엇인가? 나는 아직 학생이기에, 우선은 대학 입시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다만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마주하고 나를 지키며 이끌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리라 생각한다. 현대인들에게 사회가 맡긴 짐들. 취업, 결혼, 출산, 외모, 재산 등의 난해하고 어려운 짐들을 스스로 온전히 감당할 때, 그리고 주체적으로 이를 해결해나갈 때, 결국엔 이를 책임지는 것으로 주어진 삶을 완성시킬 때, 비로소 '나'를 지키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며, 날 붙드신 주 예수를 보네. 사망 가운데 놓여진 나의 삶을. 날 건지신 그 이름 예수." … 「나의 한숨을 바꾸셨네」, 소진영

 

▶ 참고: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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