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우의 사회 칼럼] 사라지는 단어들, 없어지는 낭만

나는 가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 각박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없었던 단어들이 정의되어가며 설명할 수 없었던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단순해질 때 나는 특히 그런 기분을 느낀다.

 

 

‘오글거린다’라는 말이 쓰이게 되며 우리는 간질간질 감성적인 말을 자제하는 사회가 되었다. 우리의 문학적 감성이 하나의 오글거림으로 변질하며 우리는 더는 서로에게 따뜻한 말을 마음껏 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오글거린다’로 정의된 후부터 우리의 감성은 없어져 버렸다.

 

‘짜증 난다’라는 말은 분노에 대한 설명을 하나의 단어로 단정 지었다. 증오한다, 분노한다, 밉다, 얄밉다 등의 수많은 단어를 ‘짜증 난다’는 말 하나로 설명을 하며 우리의 감정은 단순화되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하나로 설명을 하게 되며 우리는 간편하고 쉽게 우리의 감정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우리의 표현력, 감수성은 점점 바닥나고, 어휘력도 떨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수백 가지, 수천 가지로도 나눌 수 없다. 우리의 언어 표현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세상은 더욱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세상은 점점 더 단순해져 가고 있다. 또한, 나이에 따라 새롭게 불리는 단어들로 우리는 더욱 분열되고 있다.

 

‘꼰대’라는 말이 점점 일상에서 쓰이게 되며 따뜻하고 진심 어린 조언도 더는 좋게 들리지 않는 세상이 왔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의 조언을 더는 충고로 받아들일 수 없고, 참견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가 노인층을 ‘꼰대’로 칭하기 시작한 그 시점 이후 노인들에 대한 공경과 배려는 낮아지고, 오히려 그들을 혐오하는 시선도 늘어났다.

 

'급식충(: 최근 나이가 어린 학생들을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라는 말은 반대로 어린아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게 했다. 소수의 잘못된 행동을 일반화하여 그들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있는 권리를 쥐여주는 셈이다. 이렇게 나이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은 개인의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누군가는 초콜릿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녹차를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이 존중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무시하는 누군가의 유치한 말에 무조건 나이가 어릴 것이라는 편견으로 조롱하고, 상대방을 향한 따뜻한 말 한마디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꼰대의 잔소리, 지적으로만 듣게 되는 사회가 온다면 누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을까?

 

지금 나의 이 칼럼 또한 누군가에게는 오글거리는 문장들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린 아이의 푸념으로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세상은 점점 개인주의로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상대의 온기를 느낄 수 없는 지금, 우리는 우리 사이의 온기를 높여야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서로에게 차가워지는 사회란, 더는 따뜻함이란 없는 사회란 절대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행동이, 주변으로 번져나가는 순간 우리의 세상은 조금 더 다채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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