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현의 정치/시사 칼럼 1] 우리를 홀린 것, 우리가 흘린 것, 언론.

현대 사회의 부조리, 그 정점에 서 있는 언론 권력을 파헤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우리가 언론의 강력함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관용표현이다. 저 말처럼 언론의 힘은 강력하다. 10년 전, 이를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은 평생 언론의 괴롭힘에 시달리다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 사람은 강력한 선례로 남았고, 수많은 정치인들이 언론 앞에 무릎 꿇는 결과를 낳았다. 자신들의 힘을 너무나 잘 아는 언론은 권력자들과 손잡고 그들을 추앙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더러운 면모를 손수 가리고 ‘신’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언론은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았고, 킹메이커로서 우리의 사회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입속의 검은 잎"(1989) 中

 

시 ‘홀린 사람’에서 사람들은 ‘그분’에게 홀렸고, ‘그분’을 추켜세우는 ‘사회자’의 말에 홀렸다. 일제히 박수를 치고, 사내들은 울먹였으며,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권력자와 언론의 선동에 완전히 ‘홀린’ 것이다. 시에서만이 아니다. 언론이 특정 세력을 비호하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프레이밍’을 시도할 때, 대중들은 어김없이 그 프레이밍에 속아 넘어간다.  소설 ‘잔인한 도시’에도 드러나듯 ‘새에게 자유를 돌려주자’라는 슬로건을 들어 프레이밍을 시도한 새 장수에게 사람들은 흔쾌히 넘어간다. 물론 이 경우 자신을 비호한다는 점에서 목적은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중이 프레이밍에 수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론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했고, 언론의 ‘목적’이 되어야 할 우리가 언론의 ‘수단’으로 전락했다. 우리는 어느새 언론에 ‘홀렸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의 언론을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우리'라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한낱 자본에 불과한 언론에 ‘공적 자격’을 부여했고, 바로 우리가 취재라는 명목으로 우리 사회를 들쑤시고 다닐 ‘특권’을 부여했다. 하지만 우리는 언론에 공적 자격을 부여하고 특권을 쥐어주면서도, 언론을 책임지지 않았다. 사냥개가 사람을 물었을 때, 사냥개가 아닌 사냥꾼에 책임을 묻듯, 언론 방임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언론이 권력을 형성하게 하고,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이 결합하여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되게 했다. 우리가 언론을 권력의 앞잡이이자 킹메이커로 추락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언론을 ‘흘렸다.’

 

 이제라도 그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 ‘홀린 사람’의 미치광이처럼, ‘잔인한 도시’의 사내처럼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언론의 주인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라는 속담의 반례를 몸소 선보여야 한다. 이것이 짧게는 70여 년간, 길게는 600여 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한 부조리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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