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시 행복로 광장에 있는 이성계상은 의정부역에서 나온 사람들을 제일 처음 맞이해주는 의정부의 상징이다. 의정부에 살고 있는 시민이라면 이성계 동상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것이다. 이 동상을 보면서 이것이 왜 의정부에 세워져 있을까 궁금증을 가져본 적도 있을 것이다. 수많은 장소 중, 이성계상은 왜 의정부에 세워져 있는 것일까? 의정부시와 이성계의 인연은 왕자의 난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자의난으로 졸지에 아들을 잃고 왕위마저 빼앗긴 태조는 자신의 고향인 함흥지방으로 가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함흥에서 돌아온 태조는 한양으로 가기 전, 이곳 의정부 호원동 전좌마을(현재 이 일대 수도권 1호선 전철역사를 회룡역이라 부르는데, '회룡이라는 말은 "용(이성계)이 돌아왔다"라는 의미이다)에서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태조를 맞이하기위해 정승들이 의정부로 왔고, 이들이 이곳에서 국정을 논의하였기에 이곳의 이름이 의정부가된 것이다. '의정부'는 의정부시의 명칭이자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으로 정승들이 국정을 논의하던 일종의 국무회의 같은 것이었다. 의정부라는 명칭은 그 당시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경기도 양주군 둔야면 의정부리"라는 부락명칭으로 등록되었다. 고구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이 가까워진 만큼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날, 바로 3월 1일이 다가올 날이 머지않았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으로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이 날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3.1절(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3.1운동이 점차 확대되면서 지식인에서 학생, 노동자, 농민까지 전 계층이 참여하는 민족적 시위가 되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동휴학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전국으로 3.1운동이 확산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에 구속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본 경찰에 구속된 사람 중에 무려 58%가 농민이었다. 이렇게 일제에 저항하는 3.1만세운동이 전국적 시위로 확장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열의가 뜨거워지고, 그 결과 1920년대 다양한 계열의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즉, 3.1운동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독립운동의
의정부 발곡고등학교에서 지난 6월, 교내에 빵과 음료수 자판기를 들여왔다. 학교 측에서는 "아침을 거르고 오는 학생들, 그리고 활발하게 뛰어놀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학교의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에 의하면, 학생들은 자판기 운영에 대해 매우 만족하고 있으며, 교사들 또한 자판기 운영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 몰래 수업시간에 자판기에서 구입한 음식을 섭취하는 학생이 다수 발생하여 수업을 방해하는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또한, 학교 급식을 운영하고 있는 영양사선생님은 인터뷰에서 "자판기 운영으로 인해 빵과 음료수로 배를 채운 학생들이 급식을 거르는 일이 발생해 정성껏 준비한 급식이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고 있다"며 안타까움을 호소했다. 이어서 "자판기 이용은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했으면 하는 바램이다"라며 영양사로서의 입장을 밝혔다. 한편으로 학생들 입장에서는 자판기를 들여옴으로써 학생들이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학교생활을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다는 좋은 점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자판기 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