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진의 역사문화칼럼 2] 역사속 기록의 의미

얼마 전 최순실 국정 농단을 조사하던 특검팀 관계자는 안종범 전 청와대 수석의 수첩을 두고 “조선시대 왕실의 사초처럼 과거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발언했다. 증거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특검은 일자와 내용을 꼼꼼하게 기록한 그의 수첩으로 난관에 부딪혔던 수사에 활력을 찾을 수 있었고 이후 법원에서 증거로도 활용됐다고 한다.


특검이 안 전 수석의 39권의 수첩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고 꼼꼼한 기록물인 조선시대 사초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왕실은 왕의 통치 행위를 담은 ‘실록’과 왕명 출납을 담당한 승정원이 다룬 사건과 문서를 다룬 ‘승정원일기’, 국왕의 일기인 ‘일성록’ 등의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기록물들을 남겼다.


작년 역사 강의에서 들었던 인상 깊은 내용이다.


조선시대 기록물엔 사소해 보이는 것들까지 정성스레 적혀 있는데 예를 들어 ‘의궤’엔 국가적인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며 행사를 위해 준비한 요강, 대야, 심지어 걸레의 개수까지 정확히 남겼다고 한다.



특히 실록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을 정도이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편집의 독립성과 기록에 관한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 신뢰도가 높다고 하니 이러한 우리의 역사기록물에 대해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세종대왕도 실록을 보고 싶어 하는 궁금증은 참기가 어려웠던지 태종의 기록을 열람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불가하다는 영의정 황희에 의해 결국 실록 열람을 포기하고 만다.


당시의 기록에는 ‘후세 사람들이 그른 일을 옳게 꾸미고,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고, 사관은 기록에 두려움을 느껴 결국 후손이 기록을 믿을 수 없다.’라는 논리였다. 얼마나 멋지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조들인가.


기록은 잊힐 뻔했던 인물, 사건을 후손에게 돌려준다. 한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기록들이 등장해 통념과 학설을 뒤집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미륵사지 석탑은 서동요로 친숙한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간청하여 세웠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지만, 2009년에 석탑을 보수하며 발견된 봉안기 에는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시주했다’고 적혀 있어 선화공주와 무왕이 진짜 부부였는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고 한다.


현대에도 기록은 중요한 제보자가 되고 있다.


정부, 언론의 기록, 개인이 남긴 일기, SNS 등을 통해 우리의 삶은 매일 기록되고 있다. 다양한 기록물을 통해 현재가 후세에 기억되고, 역사가 된다.


며칠 전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의 기록물을 ‘지정 기록물’로 봉인했다고 한다. 최대 30년까지 기록의 내용은 물론 목록조차 공개할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충실한 기록을 물려주어 후세에 역사를 돌아볼 기회를 주고 나아가 보다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참회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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