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의 독서 칼럼] 또 다른 존재의 의미를 찾는 기회, 변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시리즈 1

고등학생이 되어 생각을 넓고 깊게 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고전문학과 친해지려고 노력 중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와 근본을 배우는 데 고전문학이 도움이 된다는 누구의 조언이 이 방법을 무작정 선택했던 이유가 된 거 같다. 그 가운데 미술 교과 선생님께 추천받은 카프카의 ‘변신’은 ‘당신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주인공과 대화하고 싶은 그런 작품이었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직접 이야기하고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바라는 선택을 하고 있던 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자기에게 자유롭지 못했던 주인공의 답답한 마음이 그의 마음인지 나이 마음인지 변별하기 어려웠던 책이다. 태어났으니 내가 태어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당연했기 때문에 ‘내가 사는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그저 막연했다. 자신의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보다 자신으로 현실을 살 수 있게 하는 현실에 바둥거렸던 주인공에게 이것은 사치였을지 모른다. 이 책을 다 읽는 동안 지금 사는 ‘나의 존재 이유’를 지속적으로 나에게 물어봤지만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주인공 ‘잠자’가 벌레로 변신하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난데없이 한 마리의 딱정벌레로 변한 잠자를 통해 존재의 의의와 실존의 무게를 상실하고 껍데기만 남은 인물의 내면을 비춘다. 존재의 가치와 실존의 무게를 상실한 도구화 된 잠자.  아침에 일어난 잠자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가진 흉한 딱정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 외에 그를 둘러싼 주변 세계는 여전히 현실 그대로였다. 

 

출장 영업사원으로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첫차를 타고 출근했던 그의 일상은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신한 후,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딱딱한 등껍질을 바닥에 대고 배가 천장으로 뒤집힌 채 주워 가느다랗고 긴 다리를 아무리 허공에 허우적거려도 자신의 몸을 한번 뒤지기도 벅찬 벌레가 되어버린 그의 변화는 곧 그가 함께 사는 가족의 운명에도 변화를 가져온다. 5년전부터 가장으로 존재감을 상실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지하며 무력한 일상을 살아왔고 가족의 생계는 전적으로 그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현실로 그는 삶의 여유란 그에게 사치가 된다.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의 일상에서 멀어지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그것을 만들어 가는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생계를 위한 목적으로 자신은 활용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출근 시간이 한참이 지나도록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도 직장에서 영구 퇴출당할까 두려워하며 온몸으로 발버둥을 치는 잠자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가 초라하게 보인다. 다행히 잠자에게 애착이 있던 여동생은 그를 돕는다. 그러나 의사를 전달할 수 없는 잠자는 비자발적 고립의 세계로 그를 더욱더 외롭게 한다. 더는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찾을 수 없다. 그가 존재하는 의미였을 가족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그는 점점 공허감에 물들어 간다. 그리고 그를 인정해 주던 여동생마저 점점 멀어질 때, 그는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 알맹이를 상실한 한 인간의 무너진 내면세계는 외부의 공격과 냉대 속에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잠자는 점점 먹을 수 없었고 점점 상처가 깊어져 기력을 상실해간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진다.

 

카프카, 그는 ‘인간으로서 실존하는 이유를 아니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은 죽음과 같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지금 나를 중심으로 관계하는 내가 보고 느끼는 그것들로 증명되는 것인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쉽게 생각했을 것인데 이 책을 통해 ‘실존’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고 좀 더 나의 삶을 진지하고 의미 있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 답은 아직도 정리되지 않아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재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나를 증명한다는 새로운 생각에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를 둘러싼 것들에 보다 더 의미가 있고 바라볼 수 있을 거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본다. 혹시 잠자가 당시 자신의 변신으로 충격적이고 혼란했겠지만, 다시 곤충으로서 자기 삶의 방식으로 그 의미를 찾으려 했다면 또 다른 삶을 개척하고 적응해내지 않았을까? 아마 그는 그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상실감이 컸을 것도 예측된다. 그런데도 공허함으로 남은 삶을 채웠을 잠자가 ‘변신을 또 다른 삶으로 인정하고 살아갔다면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와 그 가치를 인식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과 안타까움이 한편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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