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의 문화 칼럼] 수험생활과 등잔 밑의 행복

최근 <행복으로 보는 서양철학>이라는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 점이 있다.  평소 행복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지만 행복에 대한 나만의 기준과 가치는 없었다는 것이다. 책 속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 많은 철학자들 가운데에서도 내가 평소 방탕한 사람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에피쿠로스의 행복 철학이 나에게 준 교훈과, 이를 사회적 차원으로도 연결시켜 생각해 본 내용을 칼럼을 통해 써 보고자 한다. 

 

 

에피쿠로스는 “빵과 물만 있다면 신도 부럽지 않다”라고 주장하며 소박한 즐거움을 통해 고통 없는 행복,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을 설파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였다. 그가 추구한 행복은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흔히

주변으로부터 배우는 행복의 의미와는 달랐기에 흥미로웠다. 어른들은 고등학교 수험생활만 끝나면 세상 모든 행복이 찾아올 것처럼 말하곤 한다. 교육제도 또한 학생들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잠시 포기하도록 만든다. 에피쿠로스였다면 이를 매우 역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좋은 대학에 가기만 하면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상상 속에서 기대는 점점 커지는데 현실, 즉 성적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결국 실망만 커진다는 것을 나는 느껴왔다. 에피쿠로스는 공허한 욕망을 추구하며 기대 수준이 점점 높아지면 결국 남는 것은 고통뿐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내가 고등학교 생활을 하며 느껴온 바와 일맥상통함을 느꼈다.

 

나는 또한 <호모데우스>라는 책에서 나의 개인적인 경험 외에도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책 내용에 따르면 에피쿠로스가 제시했던 행복의 추구는 개인적 과제였던 반면 현대 사회에서는 집단적 과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많은 나라는 교육제도와 복지제도를 통해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수치인 GDP를 성장시켜 국민들의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 실제로 1950년부터 일본과 미국은 유례없는 GDP 성장을 이룩하며 물질적 충족을 과잉 수준으로까지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적 여건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높아진 것은 만족도가 아닌 기대치였기에, 오늘날의 일본인과 미국인의 주관적 행복도는 오히려 1950년대보다 낮다는 연구 결과는 특히 놀라웠다. 물질적 쾌락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다 보면 찾아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라는 에피쿠로스의 주장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거꾸로, GDP는 세계 꼴찌 수준이지만 국민행복지수인 GHP는 세계 최고 수준인 부탄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행복이 객관적인 주변 환경보다는 주관적인 기대치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잡하고 바쁜 삶에서, 소소한 일상 속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덴마크의 ‘휘게 라이프’와 미국의 ‘킨포크 라이프’ 등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이제는 하나의 열풍으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소확행' 관련 컨텐츠들이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열풍이, 에피쿠로스가 행복은 소박한 즐거움에서부터 온다는 자신의 주장을 직접 실천한 ‘정원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도 퍽 닮아 있다는 점에서 그의 행복 철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험생들의 자살이 적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미래의 커다란 행복을 공부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앞만 보고 질주하기보다는, 성적에 대한 욕심과 기대를 조금은 덜어 내고 주변 친구들과 즐거움을 느끼는 등 공부의 과정에서부터 소소한 행복을 얻는다면, 그 결과로서 따라올 행복은 더욱더 값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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