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빈의 영화 칼럼] 소공녀,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너

“소공녀”. 이 단어는 나에게 소녀답고 부드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영화 소개에 쓰여 있는 여주인공 ‘미소’에 대한 설명 중 ‘위스키와 담배, 남자친구만 있으면 된다’는 문구는 낯설고도 흥미롭게 읽혔다. ‘술, 담배’라는 유해한 요소가 ‘소녀’와 어떻게 어우러져서 포스터처럼 서정적으로 그려질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내가 괜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지만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선 소공녀의 영어 제목은 “Micro habitat”이고 이것은 미소서식지를 뜻한다. 주인공 미소의 이름도 미소서식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미소서식지는 작은 생물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의미하는데 제목처럼 이 영화의 내용은 미소가 자신의 집, 서식지를 찾아다니는 내용이다. 미소는 고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가정부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성 캐릭터이다. 미소에게 별다른 욕심은 없다. 미소는 오직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남자친구 한솔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백발인 미소가 그 머리를 흑발로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먹는 약도 있다. 작은 방 한 칸에서 하루하루 벌어가며 빠듯하게 살아가던 와중, 어느 날 집값도 오르고 담뱃값도 오르게 된다. 한정된 수입 안에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커진 미소는 매일 한 잔씩 마시는 위스키와 담배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결국 그녀는 방을 빼게 된다. 집을 잃은 미소는 묶을 곳을 찾아 대학교 밴드 동아리 멤버들을 차례로 한 명씩 찾아간다.

 

 

문영, 현정, 대용, 록이, 정미 등등 친구들을 한 명씩 찾아가는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이 과정을 보며 많은 사람과의 많은 관계, 많은 갈등과 유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찾아간 문영은 미소에게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친구 관계라지만 저마다 허락할 수 있는 자신의 영역은 다르다. 어디까지 침범해도 괜찮은지는 모두 다르다. 친구라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영의 입장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집을 공유하자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청년 누구나 충분히 맞닥뜨릴 수 있을 만한 상황이고 갈등이었다. 첫 번째 실패를 이어 두 번째로 현정을 찾아가는 미소. 현정은 흔쾌히 자신의 집을 허락한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현정은 남편뿐만 아니라 시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소가 현정의 집을 들리지만, 친구의 남편과 시부모님까지 한 식탁에서 함께하는 식사 자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충분히 넓거나 대단한 방음 처리가 되어 있거나 화장실이 2개인 집도 아니라 하룻밤이라지만 생활하면서 굉장히 눈치를 보게 된다. 어쨌거나 미소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문영과 깊은 밤만큼이나 깊은 대화를 나눈다. 결혼생활과 그로 인한 변화 속에서 쌓여오던 심리적 스트레스가 북받쳐 오른 문영은 눈물을 흘린다. 미소가 그녀를 안쓰러워하던 것도 잠시 문영은 금세 잠이 들어있다. 그동안의 생활이 얼마나 고되었는지 그런 문영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문영과의 만남에서는 요즘 청년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과제, 결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미소는 다음 날이 되자, 아침을 해놓고 이른 시간에 문영의 집을 떠난다.

 

세 번째로 찾은 친구는 대용이다. 얼마 전 결혼했다는 대용의 집은 예상과 달리 난장판이 되어있고 아내는 없었다. 대용은 이혼을 했다고 한다. 미소는 방구석에서 울며 폐인처럼 지내는 대용을 위해 싹 청소를 해놓고 대화를 시도한다. 쉽게 미소를 마주하지 못하던 대용도 어느새 미소에게 위로를 받고 있다. 대용이라는 인물은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이 겪는 좌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와 백년가약을 맺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만만치 않은 일인지, 그에 실패에 따른 고통은 얼마나 큰지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어 다음 집의 주인은 록이다. 미소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오빠 록이는 노총각이다. 록이의 부모님 또한 그의 집을 찾은 미소에게 이상하리만큼 과한 친절을 베푼다. 그날 밤 록이가 미소에게 꺼낸 말은 다름이 아니라 결혼하자는 이야기였다. 노총각으로서 결혼을 누구와 하느냐보다 그냥 하루빨리 하는 것이 중요했기에 쉽게 나온 제안이었다. 록이의 마음 또한 공감할 수는 있었다. 바쁘게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가며 결혼이라는 과제에 쫓겨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마음속의 짐이 생긴 듯한 사람들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록이에게 불편함을 느낀 미소는 마지막으로 정미의 집으로 향한다. 으리으리한 집에 화려하게 살고 있는 정미는 미소가 묶을 방을 제공해준다. 미소도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서 묶으며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나 싶지만 머지않아 정미는 미소에게 날카로운 말을 남긴다. 술, 담배를 고집하며 집도 없이 살아가는 미소가 한심하고 염치없다며 일침을 가하는 정미는 처음으로 미소에게 배려해주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정미는 참아오던 불만이 터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친구라면 어떤 부탁이든 상관없는 미소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존재만으로 정미가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줄은 몰랐던 미소는 나름대로 정미와 대화를 마치고는 다음 날 그곳을 떠난다.

 

결국 미소는 집 없이 한강 근처에 텐트를 치고 살아간다. 롱샷으로 보이는 텐트는 비현실적이고 웃겨 보이기도 하지만 그 광경은 왜인지 씁쓸했다. 집이 없어도 취향과 생각은 있다며 씩씩하게 지내오던 미소는 위스키와 담배는 포기하지 못하지만 더는 약을 살 수 없게 된다. 백발이 되어있는 미소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뭔지 모를 울림이 가슴 속에 울린다. 백발이 되더라도 위스키와 담배를 지켜낸 미소는 나머지 하나를 잃는다. 바로 남자친구 한솔이다. 그저 그가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 미소와 달리 한솔은 돈을 벌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다. 한솔 또한 미소를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현실에 등 떠밀려 미소와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이들의 이별 장면은 참 슬프고 안타까웠다. 마음만으로 되는 것이 하나 없는 세상에서 주변 환경에 의해 사랑하는 한솔이, 미소에게 꼭 필요한 것 중 하나인 한솔이 떠나가는 것은 미소의 처지를 더욱 쓸쓸하게 하였다. 가여워 보이면서도 미소는 멋있었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현실 속에서도 자기 생각과 취향은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는 그녀는 대단했고 본받고 싶었다.

 

 

영화 <소공녀>를 보며 현실에서 마주할 수 있을 사람들의 많은 사정들을 엿볼 수 있었고 그러한 현실에 대해 다시 돌아보게 하였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각박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무엇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다. 이 영화를 접하는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위스키와 담배, 그리고 한솔’을 찾아내어 자신만의 행복을 가꾸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생겨난다. 순탄치 않은 상황에서도 나의 생각과 취향, 행복을 지켜내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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