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학생이고, 그래서 특성화고 학생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특성화고의 현장 실습생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고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요지의 뉴스를 본 적이 있었지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관련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체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고 나는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점에서 학생 인권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서, 저자는 CJ제일제당으로 현장실습을 갔다가 상사의 폭력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동준 학생, 생수를 제조하다 기계에 가슴이 끼어 사망한 이민호 학생의 유족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하며 특성화고 학생 노동 착취의 문제점을 고발한다. 사회 시간에 청소년 노동권에 대해 많이 배웠으면서도 실제로 큰 관심 없이 남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정해진 근무시간을 벗어나는 초과 근무, 직장 내 폭력, 보수 설비 부족 등 노동 관련 법률에서 규정한 부분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일부 영세 업체들의 실체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분명히 관련 법은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법만 만들어두면 되는 게 아니라 위법 행위에 대한 적극적 항의와 예방이
세계 명작이라 불리는 <제인 에어>를 다들 한 번씩은 읽어 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하고 고아이지만 강단과 소신을 갖춘 지혜로운 제인 에어가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로 들어가 저택 주인 로체스터 씨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로체스터에게 미쳐 버린 아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둘의 사랑이 좌절되고, 손필드 저택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제인은 불구가 되어 버린 로체스터 씨와 마침내 사랑을 이룬다. 나 역시 <제인 에어>를 좋아해서 족히 세 번은 읽었지만, 책 속 로체스터의 '미쳐 버린 아내'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내에게 광기가 있는 줄 모르고 속아 결혼했다가 결국 미쳐 버린 아내를 가둬 둘 수밖에 없었다던 로체스터의 사연이 나오는 대목에서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여기, 로체스터의 말을 의심하고 뒤집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사람도 있다. 이 칼럼을 통해, 명작을 배짱 좋게 뒤집은진 리스의 소설<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소개하고 싶다. 이 책은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나오는 것보다 이전 시점에서 진행되는, 일종의 스핀오프이자 프리퀄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인간 복제를 다룬 SF 영화와 소설들은 굉장히 많다. 나도 복제 인간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을 많이 접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내게 더 특별하다. 이 책에 복제 인간이 세상 밖으로 나오며 겪는 모험 같은 것은 없다. 고통받던 복제 인간 주인공이 현실과 맞서 싸워 자유를 쟁취하게 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은 자신이 복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게 담담하게 주인공의 삶을 그려내기에 오히려 그 순간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복제 인간을 만들어 장기 기증을 시킨다는 설정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부자가 아니라 오히려 인생이 힘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한다.부자들의 경우 자신과 똑같이 생긴 복제 인간이 착취당하는 것을 보는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이유인데, 그동안 흔히 봐 오던 인간 복제의 설정들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직접 보거나 자각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고통으로 우리가더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면, 그 풍요는 받아들이되 타자의 고통은 직시하지 않으려 하고 없는 것처럼 취급
2020년 9월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름은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왜 유명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몰랐는데, 미국 전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는 말에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일생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다. 법조계에 관심이 있다면 물론이고, 혹 관심이 없더라도 긴즈버그의 당당함과 역경을 헤쳐온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칼럼에서 소개하려 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1993년에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27년 동안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려온 법조인이다.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거의 언제나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편에 서왔다.특히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군사학교에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던 사건이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인용: 네이버 지식백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원이 명령했듯이, 기회의 문을 관리하는 정부 관계자들은 '양성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초해 적격한 개인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1996년 6월 26일,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섰던 '디지털 교도소'에 대해 지난 9월 24일 전체 차단 결정이 내려졌다.경찰에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사이트 차단을 요청한 지 2개월만의 조치라고 한다. 그동안 경찰은 여섯 차례나 사이트 차단을 요청했지만, 불법성이 확인된 일부 정보들만 시정 요구가 내려졌다가, 디지털 교도소 운영진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요구에 불응하자 마침내 전면 차단이 결정된 것이다.1 디지털교도소는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인터넷 사이트로, 운영진 측에서는 "대한민국의 악성 범죄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에 한계를 느껴 이들의 신상정보를 직접 공개해 사회적 심판을 받게 하려 한다"고 사이트 개설 이유를 밝힌 바 있다.2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디지털 교도소 관련 뉴스들을보며,과연 범죄자에 대한 '사적 제재'가 정당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방심위에서는 사이트의 공익적 취지 때문에 전체 차단에 반대했었다고 하는데, 사이트의 공익성을 명확히 증명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사이트에 올라온 신상 정보 중 일부는 여성가족부의 '성범죄자 알림e' 서비스에서 공개된 신상 정보를 다시 게시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사이트 운영자의 결정에 따른 신상 공개로, 재판 결과가 아직 나
핵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영국인 소년들을 이송하던 비행기가 외딴섬에 불시착한다. 적게는 여섯 살부터 많게는 열다섯 살까지 되는 소년들은 문명에서 벗어난 곳, 어른들도 없고 규칙도 전무한 무인도에서 저희끼리 협력해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줄거리다. 무인도 생존기를 그린 소설과 영화는 셀 수 없이 많고, 그 주인공이 소년들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1954년에 발표된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은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와는 다르게, 무인도에서의 모험과 생존을 위한 분투 자체에 집중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오히려 <파리대왕>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소년들 사이의 위계와 서열 변화, 고립된 곳에서 커지던 갈등이 결국에는 광기로 번져 가는 모습이다. 읽기 전엔 막연히 <파리대왕>이 나 같은 학생들을 타깃으로 쓰인 모험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건 전개와 세부 묘사가 꽤나 잔인하고 충격적이어서 놀랐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린다. 리더가 된 열다섯 살짜리 랠프의 주도로각종 규칙을 만들고역할을 분담하며 생존해 나간다.그러나 몇몇 소년들이
2018년, 세계보건기구(WHO)는 ‘감염병 예방 행동을 위한 연구개발 청사진(R&D Blueprint)’의 연구대상 질병 목록 끝에 미지의 감염병 '질병 X'를 추가했다. 그리고 2020년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로 미지의 질병 X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미 질병 X의 시대가 우리 앞에 도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등 코로나 이후의 새로운 일상을 일컫는 단어들이 생겨나고 있고, 더 이상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생각해보면, 에볼라바이러스나 메르스 등 우리는 그동안 수많은 감염병들을 겪어 왔다.그런데WHO는 왜 굳이 2018년에 미지의 질병 X라는 이름을 새로 만들어야 했을까? 왜 많은 과학자들은 머지않아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감염병이 또다시 퍼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걸까? '코로나19'라고 하면 '박쥐에서 시작된 질병'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는 8월에 열린 '동물 시국 선언'을 보고 지금의 코로나 시국과 동물권 문제를 연결짓게 되었다. '절멸-질병X시대, 동물 시국 선언'은 창작 집단 '이야기와 동물과 시'의 활동가들이 8월 20일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진행한 퍼포먼
보통 '제사'라고 하면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정해져 있다. 병풍, 향초, 한 상 가득 차려진 제사 음식들. 복닥복닥 모인 가족들과 차례대로 절하는 풍경들. 어떻게 생각해도 '하와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정반대다. 그런데도 소설<시선으로부터,>의 가족들은 호기롭게 외친다. "우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낼 거야." 시대를 앞서간 여성 작가이자 미술가인 심시선의 사망 십 주기를 맞아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기로 한 가족들이 하와이로 떠난다. 그것도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제사상을 차리는 게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하와이를 즐긴뒤 최고의 기념품을 하나씩 가져오는,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보물찾기 제사'를 지낼 거라 한다. 이들이 하와이를 즐기는 방식도 제사만큼이나 독특하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하와이 명소를 둘러보는 게 아니라, 서핑을 배우고, 훌라 댄스를 추고, 책을 읽고 팬케이크를 먹으러 다닌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하와이의 새들을 관찰하며, 제사상에 올릴 최고의 커피 원두를 찾아시장을 헤매기도 한다. 딱히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을 정도로, 이 책은 심시선의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이야기를 공평하게 담
크고 작은 재난은 언제나 일어나고, 비극적인 사건 사고들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수없이 많다.그러나2020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유원>은 재난 속에서 생존한 주인공을 '생존자'로만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소설이다. 열여덟 살'유원'은 십여년 전 인터넷을 달궜던 아파트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친언니는 불이 난 집 밖으로 탈출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원을 수건에 감싸 창문 밖으로 떨어뜨렸고, 지나가던 아파트 주민 아저씨가 온몸을 던져 어린 원을 받아냈다. 번져가는 불길에 숨을 쉴 수 없었던 언니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지고, 원을 받아낸 아저씨는 오른쪽 다리뼈가 산산조각나 장애를 얻고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목숨을 구한 원은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좁은 동네에서 사람들의 동정하는 눈빛을 받아내며 성장한다. 당시엔 아기였기에그날의 화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함에도 언니와 아저씨의 희생으로 살게 됐다는 부채감에 계속 얽매여 있는 원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학교 선생님, 같은 반 친구들, 부모님까지 모두 자신을 신경써 주는데도 유원에게는그 모든 것이버겁다. 아마 자신을 친절히 대하
경기 의정부 고등학교의 졸업 사진들은 유쾌한 분위기와 눈에 띄는 분장으로 해마다 화제가 된다. 그중에서도 올해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졸업 사진은 단연 '관짝소년단' 패러디였을것이다. 아프리카 가나에서는 장례를 마치 축제처럼 치르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관을 메고 춤을 추며 이동하는 아프리카 장례 행사팀의 영상이 알려져 큰 화제를 모았고 일종의 '밈'이 되었다.'관짝소년단'은 '관'과 '방탄소년단'의 합성어로, 이들이 방탄소년단처럼 '칼군무'를 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의정부 고등학교의 일부 학생들이이 '관짝소년단'을 패러디해 졸업 사진을 찍었는데, 복장뿐 아니라 피부색까지 따라 하기 위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졸업 사진을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샘 오취리가 자신의 SNS 계정에 "참 2020년에 이런 것을 보면 안타깝고 슬퍼요. 웃기지 않습니다!! 저희 흑인들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행동입니다."라고 글을 올려 이를 비판한 것이다. 샘 오취리가 문제 삼은 부분은 '블랙페이스'다. 이는 원래 흑인 분장을 하고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극장 공연 형식을 일컫는 말이었다. 피부를 검게 칠하고 입술을 두껍게 그리며 곱슬머리 가발을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