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의 가요칼럼 5] 시대착오를 겪고 있는 한국 음악

페미니즘 ; 당신이 듣는 음악은 어느 시대에 머물러있습니까?

페미니즘이 언제부터 이렇게 불편한 단어가 되었을까? 페미니즘을 말한다는 것이 어쩌다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을까? 칼럼을 쓰기 전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최근 SNS에서 한창 떠오르고, 또 그만큼 논란이 되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겁이 났다. 페미니즘에 무지한 사람들이 편협한 사고에 갇혀 보내올 비난이 두려웠고, 나의 미진한 지식으로 페미니즘에 누가 될까 봐 걱정됐으며,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을 말한다는 것이 망설여졌다.


내가 접한 페미니즘은 언제부터인가 여성 우월주의에 물든 남성 혐오로 취급받고 있었다. 페미니즘은 남성 혐오도, 여권신장운동도 아니다. 부당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이론일 뿐, 특정 성별의 우월함 또는 열등함을 주장하기 위한 편향적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런 페미니즘이 최근 성별 편 가르기의 논리로 희생된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세계는 지금 페미니즘을 외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가 양성평등에 대해 연설하고, 미국 전 대통령이 페미니즘을 말하고, 여러 뮤지션들이 양성평등과 페미니즘을 노래한다. 그런데 왜 한국의 대중음악은 성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양성평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프레임 속에 남성과 여성을 가둬 둔 가사의 노래들이 인기차트를 차지하고, 음악방송에서 상을 받고, 뮤지션의 ‘여성스러움’과 ‘남성스러움’을 고취해주는 요소로 포장되는 것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아 요즘 미친 미친 거 같아 기침 기침하게 만드는 여자들 옷차림 다 비침 비침(베리마취) 땡큐! 내 시력을 올려 줘. (자연라식) 돈 들일 필요 없어

- 방탄소년단 <호르몬 전쟁> 가사 中


‘방탄소년단’의 노래 중 <호르몬 전쟁>은 여성 혐오 가사 논란으로 문제가 되었었다. <호르몬 전쟁>의 도입부는 여자들의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나’는 다 비치는 옷차림을 한 여자들에 대해 말하고, 이를 시력까지 올려 주는 좋은 볼거리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땡큐!’를 외치며 고마움을 나타낸다. 가사 속 여자들의 다 비치는 옷차림, 즉 노출이 왜 감사함의 대상이 되는 걸까? 이어지는 가사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녀 머리 바디 허리 다리 말 못 하는 범위까지 
관심 없단 말이 남자로선 많이 어이 상실

- 방탄소년단 <호르몬 전쟁> 가사 中


가사는 전반적으로 한 여성에 대한 외양 묘사와 찬사로 이뤄져 있다. ‘여자가 세계 최고’이며 ‘여자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가사들은 얼핏 봤을 때 여심을 저격하는 달콤한 노래로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 여성에게 무려 34번의 ‘최고’를 외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뛰어난 겉모습 때문이다. 머리, 몸, 허리, 다리, 그리고 ‘말 못 하는 범위’까지 언급하며 그녀를 ‘미(美)형 문화재’라고 표현하고 있다. 노래를 듣는 내내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노래하는 ‘나’와 그녀와 무슨 관계인지 등은 전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뛰어난 몸매의 소유자에 걸음걸이까지도 최고인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점이다.


가사를 끝까지 듣고 나면 도입부에서 몸매가 다 비치는 옷차림의 여자들에게 왜 “땡큐!”를 외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아름답고 몸매 좋은 여자를 ‘선물’과 다름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으므로 이를 부각해주는 옷차림에 고맙다는 인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방탄소년단 소속사 측은 해당 음악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내용 중 일부가 창작 의도와는 관계없이 여성 비하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많은 분께 불편함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또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이나 가치를 남성적인 관점에서 정의 내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등의 말이 담긴 사과글을 올렸다.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 돼. 
그래야 니가 날 더 좋아하게 될걸

- 트와이스 <Cheer Up> 가사 中


‘트와이스’ 역시 <Cheer up>의 가사로 여성 혐오 논란에 휩싸였다. 상대방의 연락을 받지 않고 소위 말하는 ‘밀당’을 하며 부끄러워하는 노래 속 ‘나’는 사랑에 빠진 귀여운 소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불필요한 성별 언급으로 여성에게 이상한 프레임을 씌운다는 지적도 있었다. 문제가 된 가사는 “남자/여자는 ~하면 안 돼.”, “남자/여자는 ~해야 해.” 등으로 성차별적 발언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과 유사한 느낌이 있다. 연인 또는 호감 관계에서 주고받는 애정의 심리전인 ‘밀당’이 특정 성별이 가져야 하는 규칙처럼 묘사된 것이다. 밀당 중에 있는 남녀는 서로 마음을 떠보며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남녀 모두에 해당하는 내용이 마치 여자에게만 당연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표현된 가사는 분명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도 니가 좋아 상처 입을까 봐 
걱정되지만 여자니까 이해해주길

- 트와이스 <Cheer Up> 가사 中


그뿐만 아니라, 가사에서는 밀당 과정에서 느끼는 미안함과 동시에 걱정되는 마음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이유로 여자라는 자신의 성별을 내세운다. 밀당을 이해해달라는 부탁과 여자인 것 사이에는 그 어떤 상관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이해받을 수 있는 정당한 이유는 ‘나’의 의도적인 연락 거절이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밀당 중 일부라는 것이다. 단지 ‘여자’라는 것은 ‘나’의 밀당을 이해할 이유로 적합하지 않다. 해당 가사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지만,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이 가사는 여성이 밀당 과정에서 ‘밀어내기’를 해도 이해받아야 한다는 성별 프레임을 씌우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처럼 노래 가사 속, 성별에 대한 불필요한 언급과 행위에 대한 조건으로 성별을 거는 것, 또는 그 반대로 성별에 대한 조건이 되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은 아주 사소해 보인다.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언제 어디서든 들려오는 노래 가사 속 우리가 알아채기 어려운 사소한 성 편견과 성차별 요소들이 우리를 페미니즘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지 예뻐서 너를 보는 줄 알지. 
남자는 모두 늑대야

- 인피니트 <불편한 진실> 가사 中


진짜 불편한 진실은 ‘남자는 모두 늑대야.’라는 말 속에 있다. 남자가 사실은 동물이고, 그중에서도 늑대임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남자는 짐승인 늑대처럼 위험하고 엉큼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여성과 남성은 성별에 무관하게 자신의 성적 지향에 맞는 성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욕은 늘 남성만의 본능이자 전유물인 듯 표현된다. 이러한 편견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남자는 다 늑대다.’라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모든 남성을 짐승 같고 위험한 존재로 일반화한다.


또한,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는 여자가 ‘예뻐서 나를 본다’고 생각할 것이라 확정 짓는 듯한 가사 역시 의아하게 느껴진다. 이어지는 가사를 보면 여자가 많은 시선을 받는 이유는 예뻐서가 아니라 노출 때문이다. 질투인 듯 아닌 듯 그런 그녀를 질책하는 가사 역시 황당하다. 노출 있는 의상을 입은 여성이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것일까? ‘나’는 그녀를 쳐다보는 이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 있는 의상을 입은 그녀를 원인 제공자로 취급하며 옷차림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는 모두 늑대’이니까. 시선 폭력의 가해자는 ‘늑대’라는 이유로 용인되고, 피해자인 여성의 옷차림이 문제가 되는 가사. 과연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파여도 너무 파여 뭔데 그 노출은 뭔데. 
숙일 때 조심이나 하든지. 
속이 다 보이겠어 왜이래 다 보잖아 왜이래. 
도대체 누굴 위한 거니

- 인피니트 <불편한 진실> 가사 中


이어서 는 파인 옷을 입은 그녀에게 노출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묻는다. 여성은 옷을 입을 때 옷차림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고려하지 않는다. 특별한 장소, 상황에 맞는 옷차림은 존재할 수 있으나 파인 옷을 입은 여자가 그 옷을 입은 것은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굳이 대상을 따지자면 옷을 입는 것 자체가 여성 본인을 위한 행위이다. 여자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입는다는 편협한 사고방식이 없었다면 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누군가는 이런 관점에 대해 예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는 가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다. 가사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대중들의 몫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각에 이러한 생각과 관점을 가진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1830년대 영국에서 차티스트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득권층은 선거권 확대의 필요성을 부정했다. 또한, 제한적 선거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21세기 영국은 보통선거를 법으로 보장한다. 시대는 점점 빠르게 변하고 진보한다. 우리는 결국 페미니즘에 도달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지향점은 평등이고, 이는 특정 성별이 받는 차별을 제거함으로써 실현된다. 그 차별은 가시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우리는 좀 더 확장된 생각을 가져야 한다. 넓은 의미의 페미니즘은 성별을 불문한 개인의 다양성과 차이를 주장한다. 그리고 이미 세계는 이러한 페미니즘을 따라가고 있다. 한류의 중심에 있는 케이팝 역시 더 이상 시대착오적 가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바꿔나가야 한다.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 없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주머니 속에서 흘러나오는 몇몇 노래에서 시작한다.


칼럼소개: 가요로 창조된 문화는 세상을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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