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인터넷신문

지난 11월 14일, 2020 세계 관용의 날 기념 중앙도서관과 아시아평화를 향한 이주 MAP 가 협력하여 온라인 행사 '난민과 함께하는 사람책 도서관 [우리의 옆집에 ‘난민’이 산다]'를 열었다. 본문은 사람책 내용의 일부분이다.

 

Q.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이집트 난민이고 함디라고 합니다.

 

Q. 이집트를 떠나게 된 이유가 뭔가요?

이집트에서 약대생이였어요. 학생회에 들어가 활동을 했었는데 정부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저를 10개월 동안 구금시켰어요. 그 후 더 이상은 이집트에서 살 수 없다고 느끼고 이민을 하기로 결정했어요.Q 한국으로 오게 된 경위가 어떻게 되나요? 수단이 이집트와 사이가 좋아 비자가 필요 없거든요? 그래서 2015년도에 수단으로 내려가 2년 반 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수단 안보실에서 저에게 이집트가 연락을 취했다며 돌아가라는 전화를 했어요. 결국 수단에서 유럽을 갈 계획을 세웠지만 비자가 없어 학업을 이어갈 수 없어 고등학교 과정을 다시 해야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이 찾아와 비자 없이 3개월 동안 머무를 수 있고 관광지라 위험하지 않은 탄자니아에 가게 됬어요. 하지만 탄자니아 쪽에서도 나가라는 입장을 취해서 결국 비자를 받지 않고 떠나겠다는 합의를 봤어요. 그 후 변호사를 찾아 난민신청을 받을 수 있는 나라를 찾아보았고 그 중에 한국이 비자 없이도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국에 오기로 결정했어요. 하지만 탄자니아 법에 의해서 비자 없이는 티켓을 살 수 없었고 약혼자가 터키 행 티켓을 구해줬어요 공항에 도착한 이후에도 비자가 없어서 왜 수단과 탄자니아를 갔는지, 왜 이집트를 다시 가지 않았는지 등 질문을 많이 받았고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이집트 상황을 설명했어요. 그리고 이럴때 저를 다시 이집트로 보낼 수 있는 조항이 있어서 관광 목적이라고 설명하며 약혼자가 구해준 서류 등을 보여줬어요. 그렇게 터키에서 한국으로 왔지만 비자가고 없고 말도 통하지 않아서 난민이 되기로 결정했어요.

 

Q. 가족들과의 상황은 어떤가요?

어머니와는 가끔씩 통화하지만 안전차원에서 도청이 가능하여 자제하고 있어요. 남동생은 군복무 중이라 이집트 쪽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기에 연락을 안하고 있어요. 그래서 현재는 한국에서 약혼자와 결혼하고 같이 살고 있어요.

 

Q. 이집트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이집트는 모든 걸 통제해요 시위법을 만들어 통제하고 반대세력을 테러리스트로 만들어 범죄자 취급을 해요. 내무부에 의해서 판사가 결정을 내리고 소셜미디어 같은 곳에 알린다면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욱 안 좋게 작용해요. 의견제시나 혁명 얘기 뿐으로도 더욱 엄격해지고 있어요. 현재 상황은 해시태그 같은걸 달수 도 없고 경제 상황에 대해서 말해도 안 될 정도로 더 악화됬어요.

 

Q. 한국에서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서울에서 아내와 거주중이고 6개월 전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된 노동을 하는 건설현장에 나가고 있어요. 이런 일을 해 아내와 시간도 보낼 수 없고 공부 할 형편도 못 되요. 비자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가 어렵고 살고 있다기 보단 주어진 것을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중이에요. 코로나로 인해 상황 악화도 됬어요. 비자 때문에 마스크도 살 수 없었고 정부의 정책도 누릴 수 없었어요. 전보다 나은 삶, 보통 삶을 살고는 있지만 가진 비자가 난민신청자가 받는 비자인 G1비자라 6개월마다 사는 삶, 계획 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중이에요. 2018년도 공항에서 난민 신청을 했었고 1년이 지나 연락을 하자 아무런 답을 들을 수 없었어요.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난민신청이 폐쇄되었고 판결 또한 폐쇄 되었어요. 변호사가 항의해봤지만 대답은 성의 없는 사과 뿐 이였어요. 그래도 면접 신청을 해서 10월에 면접을 볼 수 있었고 12월 말에 결과가 나와 기다리는 중이에요

 

Q. 따로 기억나는 한국에서 겪었던 편견이 있을까요?

코로나가 시작될 때 약국에서 제가 외국인인 것을 보자마자 마스크를 팔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주변에 사는 할머니가 냄새가 난다며 매일 창문을 두드리고 문을 두드리기도 했어요. 한번은 음식물을 저희 집 앞에 버려두시고서는 냄새가 난다며 소리를 질러 결국 경찰을 불러야했기도 했어요. 또 대중교통에서 제 얼굴을 보고서는 제 옆에 앉지 않고 서있거나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Q. 한국에서 만난 좋은 인연이 있나요?

한국어를 가르쳐주시는 분이 있는데 우정을 키워 아내와도 얘기하고 좋은 인연이 됬어요. 한국인이 모두 다 나쁘다고 생각은 안 해요. 반겨주는 이도 많고요. 많은 단체들과 활동을 하며 도움을 받기도해서 이런 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Q.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그저 조금의 문화나 차림새의 차이가 있을 뿐 저희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기억해줬으면 해요. 저희가 원해서 난민이 된 게 아니거든요. 어려움도 많았고 소통하려고 노력하며 한국이 어려워질 때는 저희도 같이 이겨내려 노력해요. 사회 혼란이나 일을 뺏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아주고 편견을 갖지 않는 시선을 가져줬으면 해요.

 

 

Q.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18살 민혁이라고 합니다. 이란 난민이고 디자인 과에요. 패션모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나라를 떠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무역을 하시는데 이번 일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예상하고 2010년도에 아버지와 같이 한국에 들어왔어요. 그렇게 한국의 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가다가 어린나이에 이란이 이슬람 국가인 것을 알지 못하고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다 오게 됬어요. 이걸 가족들에게 자랑했더니 가족들이 굉장한 욕을 하면서, 변절자라고 연을 끊자는 말을 했어요. 아버지는 자신도 어릴 때 이슬람을 반대했고 종교는 자신이 믿는 것만이 종교라는 말을 해주시며 상황을 설명해주셨어요. 결국 개종한 상태로는 이란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 이집트를 떠나는 결정을 내렸어요.

 

Q. 난민인정을 받게 된 경위는 어떻게 되나요?

제가 그때 어렸거든요, 그래서 인적사항을 아버지가 말해주시는 걸 따라 적느라 제대로 못 적었요. 그래서 정부가 둘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고 어려서 종교가치관이 없다며 난민신청을 기각했어요. 어리다고 종교가치관이 없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소송을 걸으셨어요. 1심 때는 난민인정을 받았지만 2심에서는 유명인이 아니라며 난민인정을 안 받아줬어요. 3심은 2심의 판결을 따랐고 2주내 이란으로 돌아가라고 출국명령서까지 줬어요. 이런 상황을 선생님께 말씀드렸고 일주일사이 저를 돕기 위해 180명이 넘는 친구들끼리 카톡방을 만들었어요. 친구들은 처음에 청원을 넣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 고민 하다가 마침 선생님 친구 중에 기자가 있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 문제를 보도해달라고 요청했고 AFP , 프랑스 신문사 등에서도 관심을 가져 취재를 했었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큰 화제가 못 됬고 청원도 3천 3만 정도에 멈춰서 마지막으로 출입국 관리 사무소 앞에서 친구들과 시위를 했어요. 이러한 노력 끝에 결국 난민인정을 받았지만 같은 가족이고, 같은 이유를 가진 아버지는 난민신청이 기각 됬어요. 그리고 난민신청이 기각 될 때는 굉장히 많은 이유를 들었는데 난민인정을 할 때는 ‘~법에 따라 난민을 인정한다’ 라는 말만 들어 굉장히 어이가 없었어요.

 

Q. 가족들과의 상황은 어떻게 되나요?

그때의 통화가 끝으로 가족들과의 전화나 접촉은 전혀 없어요. 옛날 이란의 집이 한국에만 있었어도 제가 떵떵거리고 살 수 있었을 텐데 고작 이런 일에 가족, 명예 모든 걸 잃었다는 것이 굉장히 화가 나고 황당했었어요. 종교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길 수는 없어요.

 

Q. 이란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아직도 이슬람 법이나 분위기의 변화는 전혀 없어요. 제가 어릴 때만 이란에 살아서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이란은 아름답지만 속은 어두운, 강압적인 나라였어요.Q 한국에서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1년에 한번 이상봉 디자이너가 주최하는 패션대회가 있어요. 각 파트 당 360-400명 정도 지원하고 70명을 뽑는데 2년 동안 모델로 참가했다가 요번에는 옷을 만들어 참가하느라 바쁜 삶을 살고 있어요. 옷을 잘 못 만들어서 힘들더라고요.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출석이 잘 안되니깐 저를 전학을 보내버리고 싶어하세요. (웃음) 그리고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서 인터뷰를 했었을 때는 제가 얼굴 공개를 안 했었는데 계속 저를 응원해주시고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요번에 얼굴을 공개하고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어요. 한국은 치안도 좋고 자유로운 나라라고 생각해요.

 

Q. 기억나는 한국에서 겪었던 편견이 있나요?

이번에 아버지와 함께 새로 나온 핸드폰을 사러 갔는데 아버지가 G1비자라서 할부를 할 수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F1비자를 보여주며 제가 쓰는 폰이고 제 명의로 사겠다고 항의를 했지만 외국인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해서 굉장히 억울했었어요. 처음 한국 왔을 때는 급식을 먹을 때 등 저를 피하고 뒷담을 하는 것을 많이 겪었어요. 한국에는 편견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Q. 한국에서 만난 좋은 인연이 있나요?

지금은 친구들이 저의 좀 다른 얼굴과 피부색을 특별하다고, 저를 스페셜카드처럼 멋있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해요. 또 어릴 적에 저를 차별했던 친구 몇 명을 아직도 만나고 있는데 오히려 지금은 제가 그 친구들을 ‘인종차별을 했던 것이 기억나냐’ 라는 식으로 놀려요. 그러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저한테 미안해하더라고요. 언어가 될 때와 안될 때의 차이가 되게 큰 것 같아요. 요즘은 한국에 많이 적응도 됬고 친구들과의 사이도 좋아요.Q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실제로 접하기 전까지는 편견이 사라지기는 어렵겠지만 저희가 난민이여도 그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Q.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21살 수단난민이고 수단 이름은 히샴, 한국 이름은 김한글이에요.

 

Q. 국가를 떠나게 된 이유, 한국에 오게 된 경위와 가족들과의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어요?

학업을 이어나가고 싶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내전 때문에 학교에 폭탄이 떨어지는 일이 많아서 학교를 많이 옮겨 다녀야 했어요. 한번은 옛날에 다니던 학교를 갔는데 정부에 반항하시던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이 다른 사람들로 바뀌어져있고 새로운 선생님들은 군대에 가는 것을 추천하며 수업을 별로 안 해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군인들이 선생님들과 결탁해 학교를 찾아와 저희를 부대로 끌고 갔어요. 군인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부모님과 전화할 수 있게 해달라며 친구들과 밥을 굶고 교육을 듣지 않는 등 반항을 했어요. 수단에서는 모든 군인들의 사진을 찍는데 이 사진은 훗날 군인이 죽었을 때 이름과 사망지를 적어 조그만 한 포스터로 만들어 뿌려요. 이 사람들은 공훈자로 불리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요. 이때 사진이 증명사진 같은 것이라면 부모가 자식을 군대로 팔아버리면서 사진도 같이 준 거에요. 만약 사망지가 없다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거고요. 그때 군인들이 이 사진을 찍으면 연락을 하게 해준다 해서 사진을 찍었어요. 하지만 연락을 해주지 않아 결국 수십 명의 사람들과 탈출을 했어요. 곳곳마다 검문소가 있어 대중교통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정말 먼 길을 걸어서 탈출했어요. 탈출한 후에는 부모님과 연락을 해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결정을 하고 한국에 가있던 형을 따라 한국에 혼자 왔어요.

 

Q. 한국에서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요?

형은 경비는 부담해줄 수 있었지만 저를 돌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였어서 혼자서 난민센터에 갔어요. 난민센터는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100명뿐이고 한국에는 하나 뿐인 곳이에요. 하지만 당시의 나이가 18세였는데 센터에서는 나이가 많다며 6개월밖에 있을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어도 최대한 배우고 일도 구하러 열심히 다니며 한국에 적응 했어요. 이때 지금 같이 활동하고 다니는 ‘MAP' 라는 단체를 찾아가 난민 신청을 받기위해 노력했어요. 군대에서 찍은 사진도 증거로 제출 했었고요. 하지만 난민 신청은 기각됬고 현재는 다시 난민신청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단체와 강연도 하고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우며 살고 있어요.

 

한국은 난민인정을 받기까지 6개월마다 비자를 연장하며 살아야한다. 하지만 공장 같은 곳에서는 단기로 일하는 난민들을 원하지 않아 난민들은 일자리 하나 구하기도 어렵다. 이토록 난민의 처우는 매우 취약하다는 것을 기억해주길 바라며 난민의 처우 또한 서둘러 개선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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