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민지의 독서 칼럼] 생물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협력의 중요성

<진화와 협력, 고전으로 생각하다>

우리는 매일 경쟁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늘 아침, 더 좋아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동생과 리모컨을 두고 경쟁한 일처럼 아주 사소한 것부터, 프로야구나 축구에서 우승을 두고 벌이는 팀 스포츠 경쟁,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입시 경쟁, 한정된 자원을 두고 독점권을 주장하는 국가 간 경쟁 등 말이다. 또한 위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각자 생각만 해도 손에 땀이 나고 가슴이 쿵쾅거리게 만드는 몇몇 경쟁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지속적인 경쟁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경쟁은 그만한 성과를 불러온다는 믿음 때문이리라.

 

반면 협력은 어떤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은 일은 무엇이 있었나? 우리는 과연 협력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나? 흔히 무한경쟁 사회라고도 불리는 현대 사회에서 성과와 이익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협력을 논의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상호 간의 이익을 위해 단기간의 임시 협력은 종종 일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간에 걸쳐, 그것도 내 이익이 아닌 상대의 안녕을 순수한 이타적인 마음으로 바랄 수 있는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만약 여러분과 여러분에게 소중한 사람 간의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자신의 목숨이나 혹은 그에 따르는 것을 바칠 수 있나? 적어도 나는 아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득이 될 것이 없으니까. 결국, 이기적이지만 관계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니까.

 

그러나 <진화와 협력 : 고전으로 생각하다>를 읽으며 내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나는 앞서 말해온 것처럼 협력이 주체가 되는 사회는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협력'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책을 읽고 결론에 도달한 지금, 우리가 끝없이 뻗어가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책의 주제이자 핵심 키워드인 '생물의 진화'를 통해 진화론이 발전하는 과정을 살피며 생물들의 변화하는 생존방식을 지켜본 까닭이다. 생물들은 지구상에서 많게는 수억 년 동안 살아왔다. 또한,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생물들은 각자의 '생존 방식'을 터득하며 진화했다. 그렇다면 그 진화의 핵심은 과연 무엇에 있나. 지금부터 소개되는 생물들을 보고, 다양한 생물들의 진화방식을 비교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생물들의 진화를 보며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책은 진화와 협력에 대해 각자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 5개의 이론을 나타낸 책을 정리해 점차 발전시키는 전개로 구성된다. 먼저, 생물의 진화가 기본적으로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한 리처드 도킨스와 로버트 액설로드를 주목해 보자.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이기도 한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론의 자연 선택과 유전이라는 특성이 경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생물이 협력하는 순간이 올 때는, 그것이 바로 내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는데, 따라서 나와 가장 비슷한 유전자를 지닌 가족이나 친척 등 혈족과의 협력은 자연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미나 벌처럼 같은 혈족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있는 생물들 간 협력이 도킨스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아쉽게도 생물들의 모든 협력방식의 원인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예로 흡혈박쥐는 먹잇감인 피를 구해와 자신이 협력할 수 있는 대상인 혈족들을 비롯해 피를 구하지 못한 가까운 친구 박쥐들에게도 나눠준다. 협력의 대상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족뿐이라는 그의 주장을 깨트리는 근거이다. 참고-<진화와 협력, 고전으로 생각하다> 43~46p

 

또 다른 경쟁을 진화의 기본으로 둔 학자, 로버트 액설로드는 어떨까? 그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유명한 상황을 가정하여 혈족 간 관계가 아니라도 충분히 협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죄수의 딜레마'란 공범 a, b가 결정적인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경찰에 붙잡혔는데, 이때 경찰이 서로를 배신하고 자수하면 그 사람은 무죄 선고를 해 주겠다고 말한 후의 가정이다. 둘 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면 둘 다 가벼운 처벌을 받겠지만 한쪽이 배신하면 상대방은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 혹은 둘 다 배신을 택했다면 둘 다 큰 벌을 받거나. 얼핏 본다면 이 딜레마는 무조건 배신을 택하는 것이 더 유리해 보인다. 상대가 협력을 택하면 배신을 고른 나에겐 이득이고, 상대가 배신을 택했어도 나도 똑같이 배신을 택해 복수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로버트 액설로드가 이 이론을 근거로 협력을 증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 상황을 가정해 만든 프로그램들을 대상으로 한 미니게임에서 협력을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 팃 포 탯이 우승했기 때문이었다. 팃포탯의 전략은 아주 간단하다. 협력을 원칙으로 하되 상대가 배신할 경우 나도 배신으로 응수하는 것. 간단한 전략이지만 팃포탯과 마주했던 프로그램들은 그를 상대할 때는 배신보다 협력이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이는 미니게임이 같은 프로그램들을 대상으로 반복해서 1대1 매치를 돌리는 시스템이란 점이 준 학습 결과였다. 프로그램을 사람으로 적용해 볼 때, 나와 나중에 마주할 이에게는 잘해주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준다. 또 생물이 혈족이 아니어도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평소 꼭 다음에 만날 수 있는 인물에 한정해서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아니다. 뉴스에서 간혹 '날개 없는 천사'라 불리며 자신과 생판 남이었던 사람들을 돕는 의인들에 대한 기삿거리가 나올 때를 보라. 그래도 우리는 '그냥' 베풀었다는 이타적인 마음을 가질 수 없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다음 협력을 바탕으로 한 주장들을 살펴보며 변화한 패러다임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다. 참고-<진화와 협력, 고전으로 생각하다> 77~83p

 

엘리엇 소버와 데이비드 슬로안 윌슨이 쓴 <타인에게로>는 다수준 선택론을 제시해 진화론에서도 협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사막 가위개미'라는 종을 예로 이타적인 행동이 진화해온 방식을 설명했다. 사막 가위개미라는 종의 독특한 번식이란 이렇다. 먼저 흩어져 있는 수컷 개미와 여왕개미가 짝짓기하고 난 후, 그중 여왕개미들이 근처 나무 그늘을 찾아서 모인다. 이렇게 모인 여왕개미들은 몇 마리씩 모여 집단을 형성하는데 이 집단 속에서 번식할 먹이를 마련하기 위해 집단에 있는 여왕개미 중 하나가 채집자를 자처하며 먹이가 될 나뭇잎을 구해온다. 채집자 여왕개미가 나뭇잎을 구해올 동안 나머지 여왕개미들은 출산 준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채집자 여왕개미는 다른 여왕개미들에 비해 번식력이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 그런데도 왜 채집자 여왕개미는 다른 여왕개미들을 위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인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비밀은 다수준 선택론에 존재한다. 다수준 선택론에 따르면 사막 가위개미의 채집자 여왕개미들은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행동하는 유전자 수준의 진화와 집단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 수준의 진화가 비등하게 이루어진 자연 선택의 결과이다. 단순 유전자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행동하는 <이기적 유전자>의 이론을 넘어 자연 선택은 집단과 개체 등의 여러 환경적인 부분을 종합해 나온 것이다. 채집자 여왕개미가 나뭇잎을 채집함으로써 채집자 여왕개미의 번식률이 저하되어 유전자 수준의 진화에서는 맞지 않지만, 집단으로 보았을 때 채집자 여왕개미가 나뭇잎을 가져다줌으로써 다른 여왕개미의 번식을 도와 그 집단이 크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한다. 이처럼 생물은 환경에 따라 충분히 이타적인 자연 선택을 할 수 있다. 참고-<진화와 협력, 고전으로 생각하다> 119~124p

 

그러나 이타적인 자연 선택, 협력은 생물에게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리라도 아직은 경쟁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은 버리기 어렵다. 당장 곧 닥칠 기말고사를 보고 성적을 매김으로써, 그 숫자들은 우리의 지능을 간편하게 평가해준다. 우리가 필요 이상의 경쟁을 일상생활에서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경쟁이 정말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로버트 프랭크의 <경쟁의 종말>에서는 이런 합리적인 의문에 대한 답변과 함께 경쟁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지나친 경쟁은 자연적으로도 좋지 않다. 예로 수컷 공작새는 화려한 깃털을 이용해 암컷들을 유혹하는데, 크고 화려한 깃털이 많을수록 암컷들의 선택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크고 화려한 깃털이 인기가 많아져 공작새 종의 모두가 그런 깃털을 가지도록 진화한다면 어떨까? 암컷의 환심을 사는 일은 모르겠지만 화려한 깃털이 오히려 천적의 주목을 받아 사냥감이 되기도 쉬워질 것이다. 단순 공작새의 일이라고만 치부하는가? 인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계속하여 끝없는 경쟁을 이어가면 갈수록 처음에는 개인적인 이익으로 치부될 수 있으나 점차 단체를 위협하는 피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당장 환경 문제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무한경쟁 사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이름이라 불리기엔 너무 끔찍해 보인다. 끝없는 경쟁이라는 보이지 않는 허구를 믿고 안주하지 말자. 경쟁이 어렵다면 잠깐 내려놓고 쉬어도 괜찮다. 그리고 차차 이 사회를 변화시키자. 과도한 경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도록 말이다. 마치 세상을 살아가는 생물들처럼, 서로 협력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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