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서의 독서 칼럼] 우리 사회의 '선량한' 차별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선량한 차별주의자. 모순적인 제목 때문에 책 내용에 더 관심이 갔다. 특정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 짓고, 차별하는 사람들은 ‘선량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인데,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니. 과연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는 ‘우리는 차별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라는 물음을 던지며 책을 시작한다. 이 질문에 완전히 그렇다고 답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별받는 대상에는 누가 있냐는 물음에는 모두가 조금씩 다른 답을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차별은 눈에 명확히 보이는 대상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익숙하게 스며있는 것이기 때문에,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겪지 않는 차별에 대해서는 자연히 무심해질 수 밖에 없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탄생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스스로 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믿고, 또 특정 집단에 불이익이 가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

 

 

저자는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이주민 등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가 되는 집단들의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며 차별이 정당하고 선량한 것처럼 꾸며지는 과정과 차별에 도전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나는 특히나,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어왔던 성차별에 관한 부분에 큰 관심이 갔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성별에 따른 차이라고 당연시해온 것들이 사실은 사회에 의해 교육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은 차별로써 사회 전반에 드러나고 있으며, 이를 없애고 차별을 완화하기 위한 논의 또한 활발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나 성차별을 없애려는 노력은 여성우월주의로 곡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손실 회피 편향’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이 이유를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손해를 최소화 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기존부터 차별받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조금씩 평등해지는 것이 손해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여성이 보장받는 권리가 늘어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집안일을 도맡는 존재라고만 여겨졌던 여성들은 직접 사회에 목소리를 낼 기회를 조금 더 얻게 되었고, 자신의 능력을 펼치며 자아실현을 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런 점을 들어, 이제 우리 사회는 완전한 양성평등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은 결혼이나 출산을 이유로 휴직, 퇴직을 강요받아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한민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37%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 또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대체로 집안일을 경시하고, 여성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눈에 띄게 증가한 오늘날에도 이 인식은 쉬이 변하지 않으며, 남녀가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일을 남성이 ‘도와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집안일이 가족 구성원 전체의 일이라는 지적은 매우 당연하지만 이미 뿌리내린 관념은 바꾸기 어렵다. 우리는 단순히 여성이 직업을 갖게 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 냉정히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되돌아볼 차례이다. 우리는 여성을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주는지, 집안일을 그저 ‘돕고’ 있지는 않은지.

 

책을 읽으며, 우리가 직접 경험해본 적 없다고 해서, 다른 이가 겪어온 차별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나 자신이 차별받은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모든 면에서 완벽히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여서라기보다는, 그저 내가 다른 이들보다 조금 운이 좋았기 때문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꺼리고, 차별을 지적하는 이들을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들로만 평가하고 한다. 인권은 동의할지, 동의하지 않을지를 선택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은 그 자체로 모두에게 당연하며, 지금까지 무시되어왔던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해준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권리가 감소하는 것도 아니다. 부조리함을 바로잡는 것은 공동체의 모두에게 도움이 되며, 우리 사회를 이전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차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인지도 모르지만, 무지함은 종종 근거 없는 두려움을 불러와 나에게 색안경을 씌우기도 한다. 내가 특권층이라는 말은 어쩌면 조금 어색할 수도, 불편할 수도 있다. 때로는 내가 차별주의자라며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내가 오해해왔거나 실수했던 부분들을 인정하고, 배워 나가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몰랐던 차별적인 사회 제도나 통념이 있었다면, ‘나는 누군가를 차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라거나, ‘이건 차별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기보다는 새롭게 배운 부분을 토대로 잘못된 관념을 고쳐 나가면 되는 것이다.

 

서두에 나왔던, “끊임없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자각하고 나 자신을 성찰하며 평등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는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헛된 믿음보다 훨씬 값지다”라는 저자의 말이 무척 인상 깊었는데, 나 역시 다양한 기준에 따라 어느 때는 특권층이, 또 어느 때는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최대한 객관적인 눈으로, 또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 역시 때로는 나도 모르게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며 모르고 있었던 사회의 다양한 불평등에 대해 알게 되고, 또 우리가 어떻게 그런 차별들에 도전해 나가면 좋을지 배우고 나니, 내가 마주하는 사회와 스스로에 대해 조금 더 비판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갖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 스스로부터, 또 내 주변부터 조금씩 바꾸어 나가도록 노력한다면 그것은 절대 무의미한 움직임이 아니라, 바람직한 변화를 이끌어오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리라는 자신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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