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권의 독서 칼럼]'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이성과 감정 사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카잔차키스가 1917년 실존인물인 그리스인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해안에서 광산생활을 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이 글에서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의 유쾌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순수함을 존경했고 이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많은 영감을 남겨주었고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것 그대로를 글로 쓰겠다고 나타냈다.

이 글은 우리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을 하게 해준다.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순간적인 기분에 맞춰서 살아가는 조르바와 항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그에 맞춰 살아가고자 하는 카잔차키스 두명의 상반된 관계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걸까?

 

그리스인 조르바의 줄거리

20세기 초 그리스의 피레에프스 항구에서 평생 책만을 붙들고 살아왔던 작가 카잔차키스는 새로운 도전 혹은 자신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찾아내기 위해서 돌연 크레타섬에 광산사업을 하기 위해 떠난다. 떠나는 배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고 조르바는 자신을 고용하기를 바란다. 이에 승낙을 한 카잔차키스와 조르바의 크레타섬 생활이 시작된다.

조르바는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뿐더러, 물레방아에 손가락이 걸려서 일을 할 때 불편하다는 이유로 손가락을 잘라내고, 또 많은 여자와 자유분방하게 만나고, 또 터키와의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보기도 하고, 산투르라는 악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보다는 춤이나 악기로 표현하곤 한다.

카잔차키스는 이러한 조르바를 보며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점들에 대해 부러워 하기도 하면서 조르바의 감성적인 면과 그 자신의 이성적인 면들의 판단이 가끔씩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크레타섬의 낯선 마을에 도착한 조르바는 탄광개발의 감독을 맡아서 일을 하고 경험이 없던 카잔차키스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 조르바는 현실적인 경험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능동적이고 활달한 모습으로 작업을 스스로 진행했다. 또 일을 하면서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이라는 전직 카바레 가수와 뜨거운 썸을 나눈다.

이런 생활이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가운데 마을의 젊은 과부인 소멜리나 이야기와 조르바가 케이블 사업을 하기 위해 나오는 세속적인 수도원 이야기가 중간에 계속적으로 나온다.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과부를 그냥 놔두는 것은 죄악이라고 카잔차키스에게 지금말로 아름다운 과부인 소멜리나에게 들이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식인인 카잔차키스는 그러지 못하고 마음만 졸이고 용기를 내서 그 집 앞까지 가기도 하지만 돌아오거나 무의식적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는 또 그 집 앞에 가 있고 결국 과부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나누는 것은 잠시 마을 장로 마브란도니의 아들 ‘파블리’가 그녀에게 구애했다가 거절당하고 자살을 하게 되자 이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은 과부에게 돌을 던지고 그러한 과정에서 조르바는 마을 사람들과 맡서보려고 하지만 마브란도니는 칼로 과부의 가슴을 찔러죽인다.

이러한 과정 후에 조르바는 빨리 케이블 사업을 진행하고자 하고 사업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기 위해서 마을을 떠난다. 조르바는 약속했던 기일보다 늦게 돌아오고 이 와중에 카잔차키스는 오르탕스 부인에게 조르바가 그녀와 결혼하기 위한 준비를 하느라 늦게 돌아온다고 설명을 하고 늙은 오르탕스 부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조르바를 기다린다. 하지만 조르바가 돌아온 이후 오르탕스 부인은 병에 걸려서 죽게 되고 조르바는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줬던 오르탕스 부인을 잃자 약간의 낙심을 한다.

이후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에 죽음을 슬퍼하는데 그 슬픔을 금새 잊고 다시 케이블 사업에 전념한다. 그리고 케이블을 작동하는 날 마을 사람들을 전부 초청해 케이블을 작동하지만 뭔가의 실수가 있었는지 케이블이 와장창 무너지게 되고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구상했던 것을 실패하게 되고 이로 인해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뒤의 내용은 카잔차키스의 친구가 죽는 내용, 조르바가 다른 지역으로 또 오다 갔다 하다가 죽는 내용이 나온다.

 

필자가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는데

먼저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카잔차키스가 춤으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장면이다. 처음에 조르바는 자기가 얘기하고 싶은 말을 말로는 설명이 잘 안되니 춤으로 표현하는게 더 낫겠다고 말하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카잔차키스에게도 함께 하자고 말하지만 그는 지식인이고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을 꺼려한다. 하지만 나중에 그 자신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춤으로 자신이 생각한 것들을 표현하는 부분이 있다. 그때 자신은 해방감과 자유감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다시 이성적이고 지식인인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서 볼 때 순간의 자유감과 해방감이 전체적인 삶에서의 자유감과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은 조르바가 어떤 일을 끊을 때 사용하는 방법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조르바는 어떤 일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일이 고통스러운 일이 될 때까지 많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일을 예로 제시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버찌를 사먹은 이야기인데 그는 돈이 조금씩 생길 때마다 버찌를 사서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돈을 조금씩 써서 사 먹으니 감칠맛만 남았고 어느 날 하루는 배터질 때까지 버찌를 먹어보겠다 하여 돈을 잔뜩 들고 가서 버찌를 잔뜩 사서 계속먹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먹어서 그 먹은 내용물을 전부 토해낸 그는 다시는 버찌를 먹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즐거운 일도 과도하게 한다면 그것이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해주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이 나는 장면은 조르바가 죽기전에 그의 아들을 통해 카잔차키스에게 편지와 산투르를 남긴다는 것이다. 조르바가 죽을 때까지 자유롭게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크레타섬에서 자신과 함께 인생을 공유했던 카잔차키스를 기억하고 그에게 산투르를 남긴다. 이 산투르는 이야기 전체에서 조르바의 자유분방함의 상징과도 같다. 그러한 산투르를 카잔차키스에게 남김으로써 아직은 자유의 의지를 완벽하게 갖고 있지 못한 카잔차키스에게 자유를 남겨주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고민을 해보았을 것이다.

잘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즐거운 일을 해야 할 것인지

필자도 요즘 이런 생각을 무수히 하고 있다.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즐거운 일을 하는데 그 즐거운 일을 즐겁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일을 잘하게 되지 않을까? 즐거운데 그 일을 못 할 수가 있을까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보면서 문득 이 생각이 났었다.

 

자 여러분은 이성과 감정에서 어떤 삶을 추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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