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채원의 철학 칼럼 15]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과거의 인간상으로부터 알 수 있는 오늘 날의 인간상

어떤 인간으로서 존재할 것인가? 이 질문은 아직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답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문제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답에 대해 고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하나의 답을 구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는 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왔다. 그 중 과거의 대표적인 세 가지의 인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월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영리해서 발명이란 것을 해낼 수 있었던 인간은 기술을 통해 우리 밖에 있는 자연을 굴복시켰다. 그리하여 인간은 생태계에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으로 가는 매개체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인간은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비록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질병과 같은 한계를 이겨낼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모든 것에 정통한 존재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신에게 맹세한 법을 준수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법을 준수하지 않고 추악한 짓을 하게 될 경우 나라가 멸망할 만큼의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을 다른 생명체에 비해 매우 우월하다면서 그것에 자긍심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사고이기 때문이다. 기술로 타 생명체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인간만을 강조하며 다른 생명체의 내재적 가치는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우월성만 바라보는 처사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동물이나 식물에게도 내재적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싱어는 이익 관심을 동일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 인간과 동물을 같은 선상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물 역시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동물을 차별할 경우, 그것은 종 차별주의라는 것이다. 또 레건은 동물 또한 도덕적 주체라고 보며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동물을 넘어 식물의 내재적 가치까지 본 테일러도 있다

 

그는 동물과 식물, 모든 생명체가 목적론적 삶의 중심이며 각각의 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오늘날에는 환경 문제가 전지구적 차원의 문제이고 인간의 삶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데, 이것은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의 유기적 관계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생존하기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타 생명체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동식물은 인간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 과거의 인간상들에는 모순이 존재한다. 신에게 맹세한 법을 지키는 인간이 바람직하다고 보는데, 여기서 신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대자연과 인격신이다. 만약 신이 대자연으로 해석될 경우, 신들의 지고한 영역을 파헤치는, 즉 대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특히 오늘날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오용과 남용으로 인간이 자연을 파괴했던 행위는 인과응보처럼 우리에게 다시 돌아와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파헤친 대가는 환경문제라는 큰 벌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신이 대자연이 아닌 인격신으로 해석될 때에도 모순이 생긴다. 인간이 다루는 많은 영역 중에는 인간이 침범해서는 안되는 신의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형이나 임신중절로 인간이 함부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윤리적 딜레마를 안고 있는 문제들이다. 인간은 결코 인격신처럼 모든 영역에 정통할 수 없다.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한 인간의 문제에 대하여 쉬이 판결을 내릴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 모든 것에 정통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모든 것에 정통할 수 있는 존재는 신이다. 인간은 신처럼 모든 것에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없으며 신들의 땅을 파헤칠 수 있는 능력도 온전히 갖고 있지는 못하다.

   

정말 바람직한 인간상이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정답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시간이 흘러 시대가 변할수록 세상이 원하는 바람직한 인간은 계속해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대마다 인간상이 다르게 존재한다. 질문이 바뀌어 오늘의 바람직한 인간상은 무엇일까?’가 되었다. 현대 사회가 원하는 바람직한 인간은 무엇인가?

 

먼저 연대하는 인간이다. 이 연대는 인간끼리의 연대를 넘어 타 생명체와의 연대까지 포함한다. 인간끼리의 연대라면, 서사적 자아나 이타심과 같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연대를 뜻한다. 다시 말해 사회성이라는 본능에 대해 충실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타 생명체와의 연대는 그들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여기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데카르트처럼 동물과 식물을 인간을 위한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가치를 가진 한 생명체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타 생명체와 연대하는 방법이다

 

현재의 우리 인간에게는 공존하려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독단적으로 존재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피해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는 과거로부터 온 후폭풍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의 영역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선은 다른 생명체의 선을 존중하는 것까지 포함해야만 한다. 즉, 인간간의 연대보다는 자연과의 조화에 주목해야한다는 것이다.

 

또 인간은 신의 영역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신은 대자연과 인격신 모두를 포함한다. 인간의 우월성에 자만하지 않고 인간에게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이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는 영역이 존재한다. 신을 죽이지 말라. 인간이 모든 것에 정통할 수 없기에 신이 설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한계가 존재하고 어떤 한계는 깰 능력이 있어도 깨서는 안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만으로 추악한 짓을 하게 될 경우, 그는 파멸을 일으킨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사회는 혼란스럽다. 이러한 혼란은 인간의 독선에서 나온다. 인간들은 이성으로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기술로 우리 앞에 있는 쟈연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겨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은 우리가 갖는 역량에 의문을 갖게하며 파괴와 수탈의 대상이었던 자연은 이제 우리 인간에게 복수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존중과 이 세계에서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 인간만이 아니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나 개인만의 이익이 아니다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믿음'은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의 - 예를 들어 난민 수용, 성적소수자, 페미니즘과 여성우월주의의 혼란 등의 문제 - 돌파구를 찾는 것에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칼럼 소개 : 철학은 우리에게 낯선 학문이 아닙니다. 한 가지 논제에 수많은 가치와 관점을 담을 수 있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흥미로운 학문이며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따뜻한 학문입니다. 칼럼을 통해 쉽고 재미있는 철학으로 한 발짝 다가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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