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빈의 영화 칼럼] 왜 우리는 <조커>에 열광하는가

 

 

2019년에 개봉하여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영화 <조커>. <조커>는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이슈가 되었다. <조커>가 흥행할 때에 우리 반 친구들도 시도 때도 없이 영화 속 조커의 춤을 따라추고, 조커의 웃는 모습을 따라 하곤 했다. 그리고 조커에게 심하게 이입되어서 자신을 조커와 비슷하다고 느끼고 그 느낌에 심취해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영화 <조커> 속 행위가 논란이 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조커에게 공감을 하게 되자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조커는 악당이다. 민중들을 괴롭히고 악한 짓을 일삼는 바로 그 악당이다. 그렇지만 영화 조커를 보고 있으면 관객들은 어느새 마음속으로 조커의 살인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어느샌가 그의 행위를 응원하고 있다. 왜 이렇게 현대 사람들이 조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공감하는 것일까?

 

영화 <조커>에서는 조커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잘난 것 하나 없었던 아서가 바로 그 조커이다. 아서는 코미디언이 되어서 세상에 웃음을 전해주고 싶다는 밝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소중한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들로 인해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오해와 조롱을 받는다. 비난과 괴롭힘이 끝도 없이 몰아닥치면서 그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피폐해진다. 그는 정신질환을 가진 연약한 사람이다. 따뜻한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아서를 살피지는 못할망정 무시하고 조롱하고 속이고 괴롭히기만 한다. 심지어 그들은 아서의 물건을 훔치고, 그를 피하거나 때리며 발로 차기도 한다.  

 

아서는 결국 그런 각박한 환경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총을 들게 된다. 선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방식들을 통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실현한다. 들이닥치는 혐오 속에서 그것들을 물리칠 힘이 스스로에게 없을 때, 꿋꿋이 이성을 지키고 도덕적으로 대응하기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렵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 잘 알기에 이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칼이 자신을 찔러올 때 바람직하고 고운 말로는 그것들을 막을 수 없기에, 자신을 지킬 수 없기에 아서도 총을 든 것이 아닐까. 우리였으면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도 아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아서처럼 각기 나름대로의 질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럽고 상처가 되어버린 아픈 구석은 모두에게 저마다의 존재로서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이해하게 되고, 그에게 돌을 던질 생각을 못 하였다. 냉정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우리들도 어딘가가 곪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서가 저지른 범죄가 옳고 타당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조커의 살인에 마음속으로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누군가 아서를 때리는 사람들을 말리고 그를 구해주었다면, 차갑지 않은 눈빛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아서가 살인까지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그가 악당이 되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주위를 따뜻한 눈길로 살피고 편견 없이 남들을 대해야 한다. 모두가 이기적인 생각들로 침묵하고 기피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커는 태어난다. 불공정이 없도록, 불평등이 없도록, 특혜와 이득이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고 모이지 않도록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어딘가에 곰팡이가 슬고 있지는 않은지 들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현실에서는 진짜 조커가 탄생하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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