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도현의 정치/시사 칼럼 2] 나, 너, 그리고 우리

'나'와 '너',그 사이의 '우리'의 정체성을 되돌아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고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부모형제관계나 교우관계, 사제관계 등이 그 예시이다. 그리고 그 관계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목적’과 ‘수단’으로서 작용한다. 그 중 ‘목적’이 의미하는 바는 이해득실의 계산 없이 그 자체로서 보듬어주고 사랑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상대를 ‘목적’보다 ‘수단’적 존재로만 치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특히나 현대인들에게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되는 관계는 애초에 생성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의 관계도 허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상대를 위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이득이 존재하는 이른바 ‘비즈니스 관계’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렇게 얕고 허약한, 쉬이 끊기는 관계는 사회 전반적으로 불신의 풍토를 조장하고, 경쟁만이 존재하는 ‘무한 이기주의’의 소용돌이로 개인들을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 소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비즈니스 관계의 단면을 매우 명확히 담아낸다.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았음에도 당장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에 외면하는 이기주의의 소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어느새 ‘우리’라는 관계 속의 정체성이 ‘너’와 ‘나’가 되었다. 어느새 우리는 관계의 상대를 타인으로 취급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철저히 무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이기적, 비즈니스적’ 존재가 되었다.

 

 

문득 철학자 칸트가 떠올랐다. 300여 년 전, 철학자인 칸트는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다음과 같은 도덕법칙을 남겼다. “너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을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하라.” 지극히 비즈니스적 관계 속에서 상대를 철저히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우리에게 칸트는 반성하고 시정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상대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기를, 즉 상대를 진실된 사랑으로 대하기를 주문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우리’라는 정체성을 되찾아야 한다. 자신의 ‘목적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목적‘이 되어주는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상대를 진정한 사랑으로, 자신과 동등한 고 귀한 존재로 인식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와 철학을 꿰뚫는 하나의 원칙인 ’황금률‘을 되새겨야 한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도 남을 대하라‘는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너‘와 ’나‘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로소 ’우리‘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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