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빈의 가요칼럼 3] 뮤지컬 넘버, 어디까지 들어봤니?

단짠단짠 ③ - 오늘 밤, 당신의 고막을 훔칠 노래들

아마 뮤지컬, 하면 가장 먼저 ‘지금 이 순간~’을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흥행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서 극 중 주인공이었던 조승우 배우가 불러서 굉장한 히트를 친 뮤지컬 넘버(뮤지컬에 삽입되는 곡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만큼 뮤지컬 오디션에서도 제일 많이 불리는 곡이지만, 심사위원들에게는 워낙 지겹다 보니 첫 소절을 듣자마자 탈락이라고 유명한 곡이기도 하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언급된 탓에 뮤지컬 팬들(속칭 뮤덕) 사이에서는 ‘지금 이 사골’이라고 불릴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이렇듯 대중성 있는 몇 곡만 가끔 언급이 되다 보니, 뮤지컬 넘버들은 일반 대중가요들보다 훨씬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또한, 특유의 뮤지컬 딕션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은 잘 찾아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좋은 음악은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며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가. 그 아무리 진입장벽이 높다 하여도 말이다. 나는 지금부터 당신의 단단한 장벽을 멋있게 부수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뮤지컬 넘버들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1. 뮤지컬 <엘리자벳> 사랑과 죽음의 론도

 

오스트리아의 황후인 엘리자벳은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인 루이지 루케니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체포된 루케니는 독방에서 목을 매 죽는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법정에서 암살자에 대한 심문이 계속된다. 오프닝 넘버인 프롤로그에서 판사는 루케니에게 엘리자벳을 죽인 배후와 동기를 추궁한다. 그는 엘리자벳이 죽음과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녀 스스로 죽음을 원했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엘리자벳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불러내 깨우는데, 이 가운데 매력적인 남성의 모습을 한 ‘죽음(토드)’이 나타나 자신이 엘리자벳을 사랑했다고 고백하면서 극이 시작된다.


어린 씨씨(엘리자벳)는 어느 날, 그네를 타다 떨어지는 사고로 죽음과 첫 대면을 한다. 죽음은 씨씨에게 키스를 하려던 순간 - 극 중 토드(죽음)는 키스로 인간의 영혼을 앗아간다. - 한눈에 반하게 되고, 결국 그녀에게 생명을 돌려준다. 바로 이 장면의 넘버가 ‘사랑과 죽음의 론도’이다.

 

(토드) 엘리자벳, 너의 차례야

영원한 안식처로 데려다줄게

(루케니) 이런, 사랑이군요

(토드) 알 수 없는 마력 날 가로 막았어

감히 나를 망설이게 해

창조와 소멸 영원할 것 같던 세상의 진리가 무너져

날 바라보는 그 눈빛이 날 애태워 내 몸과 이성을 지배해

숨소리조차 내 가슴에 깊이 박혀 얼어붙은 내 맘을 녹여

너의 차가운 생명을 얻는 대신 너의 따스한 사랑을 더 느끼고 싶어

인정해 너는 나와 함께해야만 해

내 안에서 네 꿈을 찾아

(씨씨) 나는 당신을 알죠 내 영혼의 친구 하나도 두렵지가 않아

마치 내 맘을 전부 다 읽는 것 같아 내안에 당신이 보여요

(토드) 네 스스로 널 포기할 날만을

네 스스로 날 원하게 되길 기다릴게

인정해 어디서든 내가 곁에 있어 날 찾게 될 거야

(씨씨) 첫눈에 알았죠 난 이미 원하죠 당신 안에서 숨쉬기를

가지마요 내 손을 놓지 말아줘요

(토드) 가지마 널 기다릴게

(씨씨&토드) 사랑과 죽음의 춤 안에

 

이 넘버의 특이한 점은 재연 때 추가된 넘버라는 것인데, 아마 서사의 개연성을 위해 이야기를 설명하는 장치로 사용된 것 같다. 초연에서는 세 번째 넘버인 ‘모두 반갑군요’에서 씨씨가 ‘가지마요, 왕자님’이라며 토드를 향한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정작 토드의 감정선을 충분히 설명해주지 못했었다. 토드의 임무는 죽음이 닿은 자들에게 키스로서 저승으로 인도하는 행위이다. 한국으로 비유를 들자면 저승사자 정도가 되겠다. 그런데 토드가 그러한 세상의 진리를 깨부수면서까지 엘리자벳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가사에서 절절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스스로 원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토드의 사랑 고백은 참으로 그다운 기괴함이다.


스포일러를 조금 하자면 엘리자벳은 결국 지친 저의 삶을 포기하고, 토드에게 자신을 영원한 안식처로 데려다 달라고 요청한다. 토드는 자신의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되는 셈이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자벳과 입을 맞추는 그의 표정은 왠지 씁쓸함과 성취가 교차하는 듯 보였다. 많은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던 엔딩이었다.


 

 

2. 뮤지컬 <드라큘라> loving you keeps me alive

 

동명의 작품인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드라큘라>는 2014년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재연에서도 연속 흥행을 하며 한국에서 입지를 다진 작품이다. 극 중 ‘드라큘라 백작’은 전생의 부인 ‘엘리자벳사’만을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리며 독수공방한다. 그렇게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끝에, 엘리자벳사는 드라큘라의 성으로 ‘미나 머레이’라는 이름과 함께 환생하여 돌아온다. 하지만 미나의 곁에는 이미 조나단이라는 약혼자가 있었고, 드라큘라는 좌절하다가 그녀에게 자신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실과 마주한 미나는 드라큘라에게 자연히 마음이 끌리지만, 조나단과의 평범한 삶과 드라큘라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 넘버에서 드라큘라는 미나에게 애원하듯 사랑을 고백한다. 제목에서부터 절절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가. Loving you keeps me alive,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살게 한다. 400년 묵은 사랑은 정말이지 처절한 애틋함과 한이 담겨 있다.

 

(미나) 꿈같은 삶, 완벽한 인생

눈앞에 선명한데

날 사랑한, 내가 사랑한 그이를 찾았는데

알 수 없이 찬바람이 불어오네

 

(드라큘라) 그대는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사랑

오랜 세월조차도 지울 수 없는 사랑

당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와요 나의 곁으로

 

그대는 나만의 숨결 아물지 않는 내 상처

그대 마음속에도 내가 남아 있잖아

당신의 진심을 외면하지 말고 내게로 와요

 

그대를 처음 본 순간 모든 게 변해버렸어

그 이름만 속삭여도 내 세상은 떨려

우리의 인연은 시간을 넘어 함께할 운명

다시 내게 돌아와 나와 춤춰요 새벽을 향하여

 

그댄 내게 단 한 사람 내 허무한 삶에 유일한 빛

당신만이 나를 채워줄 나의 사랑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숨조차 쉴 수 없었어

그 이름만 속삭여도 내 세상은 떨려

우리의 인연은 시간을 넘어 함께할 운명

이제 내게 돌아와 함께 춤춰요 새벽을 향하여

    


3.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혹시, 들은 적 있니

 

위의 두 뮤지컬이 외국에서 들여온 라이센스 뮤지컬이었다면, 이번에 소개할 극은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이다.


극 중 교사인 인우는 연인이었던 태희와 사별을 한 뒤로 잊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을 맡은 반에서 태희의 말투, 작은 습관까지 똑 닮은 남학생, 현빈과 마주하게 되면서 혼란을 겪게 된다. 인우는 환생한 태희에 대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교내에서는 인우가 남자 제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며 비난을 받는다. 현빈 역시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자 인우에게 화를 내지만, 왜 저를 알아보지 못하냐며 눈물을 흘리는 인우를 보며 기억을 되찾는다. 끝내 인우는 해직당하고 아내에게도 버림받게 된다. 그러다 17년 전 태희와 보기로 했던 용산역 플랫폼에서 방황하고 있던 현빈을 마주친다. 두 사람이 태희가 생전에 가고 싶어 했던 뉴질랜드에 번지점프를 하러 가며 극이 마무리된다.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17년 전인 1983년과 현재인 2000년대의 사건이 교차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1막에서는 현재의 교실 장면에서 1983년 국문학과 학생들이 MT를 떠나는 장면으로 자연스레 전환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이 MT 여행 중 태희가 인우를 데리고 산에 올라 부르는 넘버가 ‘혹시, 들은 적 있니’ 이다. 태희는 인우에게 “인우야, 들려? 물 흐르는 소리,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바람 소리.” 라며 말을 건네며 이 넘버를 부른다.

 

혹시 들은 적 있니 바람의 노래 소리를

내가 세상에 오기 전부터 여길 맴돌던 이 바람의 노래

혹시 들은 적 있니

 

생각해 본 적 있니 풍경 속 오랜 세월을

수 없이 많은 낮과 밤들도

추운 계절을 모두 버틴 이 곳

생각해 본 적 있니

 

난 들었지 내가 잠든 사이 찾아온 바람

내 귀에 속삭여줬지 영원한 무언가

어쩌면 내게 올 거야

 

그 이야기 혹시 너도 들은 적 있니

 

<번지점프를 하다>는 넘버가 좋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총 스물한 곡의 넘버 모두 피아노와 현악 6중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2년 초연 당시에 음원이 발매되었다. 지금은 제작사인 해븐이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음원을 들을 수 있던 경로가 막히고 삼연(세번째 공연)은 극을 올리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더욱 소중하고 아련한 극이기도 하다.

   


위에서 소개한 <엘리자벳>에서는 엘리자벳이 자유를 선언하며 부르는 ‘나는 나만의 것’이나 토드(죽음)가 엘리자벳의 결혼에 배신감을 느끼고 엘리자벳에게 찾아와 유혹하는 ‘마지막 춤’이라는 넘버가 더 유명하다. 또 <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인우와 태희가 헤어지기 전, 사랑을 약속하며 부르는 ‘그게 나의 전부란 걸’, 남녀학생의 귀여운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그런가 봐’라는 넘버가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그만큼 ‘loving you keeps me alive’를 제외하고는 소개한 넘버들이 각 작품 속에서 주된 넘버는 아닌지라, 조금은 마이너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인지도가 높은 곡들은 아니라는 뜻이다.


뮤지컬은 사전적 의미로는 오페라보다 대중적인 장르이지만, 매니아 층의 단단한 벽 덕인지 어쩌면 조금은 폐쇄적으로도 여겨지는 공연 예술이다. 필자는 최근까지도 자칭, 다르게 말해 지독한 ‘뮤덕 ’이었기에 그 은근한 분리선을 절감해왔었다. 하지만 사실 뮤지컬 넘버와 대중가요의 경계선은 모호한 편인데, 실제로 뮤지컬 장르 중 하나인 ‘주크박스 뮤지컬’은 대중가요를 넘버로서 그대로 사용한다. (예로 故 김광석의 노래들을 넘버로 사용한 뮤지컬 <그날들>이나 <디셈버> 등이 있다.)


사실 어떤 장르건 매니악한 부분을 건드리는 순간부터 더 깊게 탐구할 수 있다. 겉핥기식으로 인지한 문화는 결국 전반적인 이해보다는 좁은 편견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양한 뮤지컬 넘버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만을 듣고 모든 뮤지컬 넘버의 형식에 대해 자신만의 일반화 정의를 내리게 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한 문화를 메이저와 마이너로 완전히 이원화하여 질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옳은 방향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성이라는 분리선을 세우기보다는, 그 사이를 마모시키면서 안의 것들을 자꾸만 꺼내려고 노력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칼럼 소개: 감정의 올을 바느질하는, 덜 여문 글을 씁니다. 음악과 문학, 가요와 시. 장르의 경계를 적당히 허물어가며, 재미있고 다양한 각도의 견해를 담은 '단짠단짠'한 칼럼을 보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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