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의 사회칼럼 3] 누구를 위한 죽음인가?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있다. 이들은 어떤 특정한 죄가 있는 것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닌, 또는 자신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결정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2014년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낙태율을 최상위로 기록하며, 전체 신생아 중 36%에 달하는 16만 9000여 명이 낙태(임신중절수술)로 태어나지 못했다. “태아는 생명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지도 못한 채 그들은 태아들을 죽이고 있었다. 마치 사냥꾼이 덤불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모르는 존재에 대해 총을 쏘아 죽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태아는 사람인가. 태아가 생명이냐는 논란의 쟁점은 반복되고 있다. 과학, 종교, 시대 또는 사회적으로 완전히 다른 생명에 대한 논리를 펴고 있다.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낙태’를 보면 “수정 직후부터 영혼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낙태는 살인이다”에서부터 “태아는 독립적 생존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모체에 기생하는 모체기관의 조직의 일부 또는 모체를 이용하여 자기 증식하는 기생체일 뿐(fetal parasitism)이므로 낙태할 권리는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까지 각자 처지에 따라 폭넓게 늘어져 있다.



전자의 경우 나비 한 마리만 보아도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이다. 배추흰나비의 배추벌레, 배추흰나비, 배추흰나비의 알을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 보는데 왜 유독 ‘인간’만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 또는 ‘생명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저명한 분자생물학자인 데이비드 푸치 마크 박사는 “수정되어 생명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남과는 완전히 다른 한 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더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며 “사람이 앞으로 평생 어떻게 성장하고 발달할 것인지가 하나의 세포일 때부터 온전히 정해져 있다”라고 말했다. 산모의 신체 또한 태아를 외부조직으로 여긴다. 즉, 태아를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모체로부터 분리된 새로운 생명체를 고유한 DNA 구조를 지닌 한 인간으로 신체에서 반응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 세계인권선원 1조, 3조


후자는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권리로 본다.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억압(women’s right)이라는 전제 앞에 태아를 ‘인간’이라 하지 않고 단지 모체라는 ‘숙주’에 연결되어 영양분을 먹고 증식-분화하는 ‘기생체’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암세포와 비슷한 존재’와 같이 말이다. 태아를 사람이 아닌 ‘기생체’와 같은 존재로 정의하게 되면, 낙태는 살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몸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자유를 쾌락이라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낙태가 점점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자유는 쾌락이다”라는 문장 속에서 아이들을 고귀한 생명으로, 한 인격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과 사회의 분위기가 다른 사람을 더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상황이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살인은 무조건 나쁘다고 배워왔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누군가를 죽였다면 이는 엄연한 죄다. 산모들은 이러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태아는 생명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태아를 인간으로 생명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자신이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며 타인들의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더는 태아는 자신의 몸 한 부분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낙태는 아이를 죽이는 살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태아가 인간이 아닌 ‘모체라는 숙주에 연결되어 영양분을 먹고 증식 분화하는 기생체’ 라고 정의하게 되면,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태아는 생명이 아닌 자신의 몸속 ‘기생체’이기 때문에 살인이 아닌 권리가 된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고 모두 특별하다. 나는 낙태를 한 그들을 비판하는 것도 아닌,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에게 말하고 있다. 어쩌면 섹스 문화와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낸 끔찍한 결과에 대해서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사회는 개인으로 이루어졌고, 난 그 개인으로서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았는가?



칼럼 소개 : 사회.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더 알아가기 위해 사회란 분야의 칼럼을 쓴다. 사회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이고, 이곳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스토리다. '사회'라는 세상의 스토리를 읽으며 한쪽 눈을 뜨길 소망한다.

이 기사 친구들에게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