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모든 인간이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이지만 약자들의 인권 침해는 ‘필요’에 의해서만 이슈화된다.2014년 처음 염전 노예가 이슈화 된 지 7년이 지났지만 그 후로 일어난 일들은 몇몇 염전주에게 1~2년의 징역형이 선고된 것, 염전 노예 구출 경찰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것, 신안군 내 무연고 변사체가 급증한 것, 추가적으로 새우잡이 어선 노예 사건까지 발생한 것 뿐이다.1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그 사실이 전국에 방송되었는데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미미하다. 단순히 인터넷 상에서 안타깝다는 댓글 몇 개가 달릴 뿐이다. 우리 사회는 소외계층에게 잔인하리만큼 무관심하다. 여러분은 아마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한단 말인가? 막무가내로 신안으로 달려가 노예들을 구출해와야 방관하지 않는 것인가? 여기서 ‘업스트림’이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싶다. 강에 계속 사람들이 떠내려 올 때 강에 뛰어들어 구조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 좋은 해결책은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없애기 위해 강의 상류(업스트림)으로 뛰어가는 것처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때도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해야한다는 개념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인권 침해를 해결하기
나는문과생, 정확히 말하자면 사탐 과목 선택 학생이다. 사회학과를 지망하는, 중학교 시절엔 국어 교사를 꿈꿨던 천상 문과 감성을 가진, 문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문과생', 나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였던 그 단어가 혐오스러워졌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혐오에 빠지게 되었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이공계의 전성기가 도래하는 이 시점에서도 문과의 존속을 부르짖던 본인이 왜 문과에 대한 혐오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과적 감성, 추상적 표현, 정신적 표현에 대한 거부감에 빠져들었는지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어보고 싶다. 문과생을 이야기 할 때 흔히 '감성'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화려한 언변, 미사여구, 시적 표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언어의 선택. 문과적 인간들의 필수 덕목이다. 사람들을 설득하여사회를 올바른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 적어도 나 자신 움직임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지속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근 2년간 사회학과 지망생으로서 내가 꿈꾸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에, 정확히 말하자면 사흘 전 샤워를 하며 사색하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국엔 모든 게 가식이고,
우리 사회 속에서 사랑이 사라진 것 같다. 물론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인 간의,친구 간의 사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겠지만 그 사랑은 거기에 머물러만있는 것 같다. 사회로 눈을 돌리면 그곳에너무나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것들만 가득 찬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사랑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 개인 간의 사랑이 어떻게 외부로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워지지가 않아' 가수 노을이 부른 '미워지지가 않아'의 가사이다. 이 가사만큼 사랑에 대해 잘 표현한 가사가 있을까?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크고 작은 이유로 미워졌다. 좋아지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다르다. 어떻게 미워할지, 어떻게싫어할지 모르는 그런 사람.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든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맞춰주고 싶고 기꺼이 미움받으면서도 나는 조금도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 수조차 없는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또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나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배려하며 상대를 위하고 상대를 항상 생각하며 지낸다 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미얀마 쿠데타 이후의 자국민 학살 사건, 정인이 양모 장하영에게 사형 구형,평택항 대학생 사망 사고,성추행 피해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김홍빈 대장 사망 사건,이 사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방관’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방관은 어찌 보면 매우 일상적인 행동이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를 일일이 다 주우며 다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길거리의 쓰레기에 대한 방관을 한 셈이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지닌 보편적 특성인 ‘방관’ 중 어떤 상황의, 어떤 종류의 방관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상기된 안타까운 사건들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을까? 때로는 실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는 방관은 과연 윤리적으로 생각해볼 때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궁금증이 들지 않는가? 필자도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며칠 동안 '방관'에 대한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져보았고 그 생각의 결과를 경기도의 여러 청소년과 나누기 위해 이 칼럼을 작성하게 되었다. - 사회적 맥락, 종류, 과정 ‘국숫집 사회로의 이행’에서 다룬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적 가치관, 사회적 소외, 경쟁 심화에 대한 이야기가 ‘방관의 맥락 및 상황’에 대한 이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
4차 산업 혁명 시대가 도래하는 요즘, 인공지능 기술이 응용되는 분야가 늘어나고 있고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인류의 존속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필자도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맞이하는 인류의 한 개인으로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인공지능이 활용되는 사례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궁금증을 해소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인공지능과사회학을 엮어 칼럼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료조사 과정을 거쳐 본 칼럼을 작성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 소개할 인공지능 활용 사례는 ‘맞춤형 정보 제공 서비스’이다. 맞춤형 정보 제공 서비스는 이용자의 성향을 파악하여 이용자가 관심 있어 할 정보를 우선 제공하는 서비스이다. 맞춤형 정보 제공 서비스의 ‘이용자 특성 파악 과정’에는 인공지능이 활용된다. 넷플릭스를 예로 들어 설명하면 넷플릭스는 전문 인력을 동원하여 각각의 콘텐츠의 특성을 나타내는 태그를 단 후 여러 알고리즘을 혼합해 정확도를 높인 자체 제작 블렌딩 알고리즘을 탑재한 인공지능을 통해 이용자가 콘텐츠를 관람할 때마다 그 콘텐츠에 붙어있던 태그와 영상에 대한 만족도를 분
국내 언론 신뢰도가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머무르고 있으며뉴미디어상에서는 매일같이 엄청난 양의 가짜뉴스가 생산되고 있습니다.2020년 10월 미디어오늘이 시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중 52%가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배제에 찬성하고 있으며 23%는 약간의 개정을 전제로 찬성하고 있습니다.1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가 극심한 현 상황에서는 징벌적 손배제로 가짜뉴스 생산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시급해 보이고 우리 사회를 정화하기 위해서 징벌적 손배제에가 시행되야 한다는 의견은 일면 타당해 보입니다. 필자도일반인에 대한 가짜뉴스를 처벌하는징벌적 손해배상제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정치, 사회, 특정 집단, 공인 등에 대한징벌적 손배제에 반대합니다.징벌적 손배제의 핵심인 '가짜뉴스'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가변적이며, 정치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호함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징벌적 손배제에서 가짜뉴스를 구별하는 기준은 매우모호합니다. 일반적으로뉴스는 일부는 진실, 일부는 거짓을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에는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어떠한 기사가가짜인지 진짜인지를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다음으로는,가변적임에
사람들은 사회 속에서 참, 거짓을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는 문장, 명제를 자주 사용합니다. 나는 너보다 키가 커, 에베레스트산은 세상에서 가장 높아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러한 명제들은 사람들끼리 사는 데 있어 큰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는 ‘흑인이 백인보다 신체적 능력이 뛰어나, 여성은 남성보다 뇌의 수리적 사고 영역이 덜 발달해있어 등’의 명제들 또한 존재하고 이러한 명제들은 특정 계층, 인종, 성별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모든’과 ‘어떤’을 생각하는 것의 위험성은 뉴스 기사들의 제목이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애물단지로 추락한 文 대통령 대선공약’을 살펴보겠습니다.1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이행되지 않은 일부의 대선 공약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지만, 제목만 보면 ‘모든’ 대선 공약을 불이행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정치면에서 이러한 제목의 사용은 국민 간 정치적 대립을 악화시킬 수 있으며 특정 인물에 대한 극단적 ‘호불호’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야 대립이 심화하는 원인 중의 하나는 이러한 자극적이고 조
승자독식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은 불공정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능력주의 사회 유지에 일조하고 있다. 내신 시험부터 시작된 시험중독은 최근 사망사고로 이슈가 된 환경미화원 시험 중장년층으로 이어지고 있다. 고도의 경제 성장이 이뤄진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한국인의 삶과 함께해온 ‘능력’ 위주의 평가와 경쟁, 이제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하는 능력주의는 동양의 수나라에서 과거제가 시행되고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각자의 가치에 따라 권력, 명예, 재화를 분배하는 ‘분배적 정의’의 실현을 주창한 고대사회에서 시작되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현대사회로 이어져 왔다.1그렇다면 ’현대사회의 ‘기회’ 분배의 기준이 ‘능력’인 이유는 무엇일까? 업적은 보상의 기준은 될 수 있지만, 인재 선발의 기준으로는 부적절하며(아직 기회를 받지 못한 사람에게 무슨 업적이 있겠는가) 필요에 따라 분배하면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모두 똑같이 나누어 가지면 자기 계발 의욕이 저하되기 때문에 과거의 업적, 시험, 자격증 같은 ‘능력’의 징표만이 분배의 기준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 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1 평상이 있는 국숫집은 평범한 사람들이 위로와 교감을 주고받는 장소이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은 국수를 먹으며 마치 오랜만에 친정 오빠를 만난 듯 정다운 표정으로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을 나눈다.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작품 속 삼거리 슈퍼 같은 국숫집을 상상하면 떠오르는 시대가 있다. 근대화 시기이다. 물론 독재정권의 억압과 산업화 과정으로 인한 소외 계층 형성이라는 어두운 면을 가진 시대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고향’, ‘정’이라는 키워드를 들으면 마을 소위 민주주의의 꽃이 피었다고 불리는 1987년 이전을 엄밀히
몇 달 전, 특정 편의점 프랜차이즈 업체와 브랜드 패션 유통 플랫폼 업체가 남성을 비하하는 표식이 담긴 홍보 포스터를 제작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또다시 인터넷상에서 남녀차별, 페미니즘, 남성/여성 혐오와 관련된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다. 필자는 근 20년여간 반복되어온 남녀갈등이우리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작금의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남녀갈등의 본질과 남녀갈등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에 대한칼럼을 작성하였다. "갈등은 칡과 등나무라는 뜻으로 칡과 등나무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대를 휘감고 자라면서 엉키는 현상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학교에서 수도 없이들은 지겨운 래퍼토리일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서로 대립각을 세울 때우리는 이를 '갈등' 상황이라고 비유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서로를 휘감아서 밀착된 칡과 등나무의 모습에서우리는 '대립'과 '다툼'의 이미지를 연상해왔을까? 필자는 여기에남녀 갈등에 대한 본질을 꿰뚫게 해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는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이고서로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은 서로를 좋아하고 말고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남자와 여자는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