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문학이 삶에 꼭 필요한가? 굳이 없어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오늘은 내가 문학을 사랑하는 까닭, 필요한 까닭에 대하여 말하고 싶다. 사실 이번에 선정한 주제는 조금 민망할 정도로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고 쉬운 주제이다. 하지만 문학을 즐기는 사람으로서내가 쓰는 올해의 마지막 칼럼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글에 내가 사랑하는 문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싶었다. 문학은 언어를 매체로 표현하는 작품과 예술을 뜻한다. 이런 짧고 단순한 정의에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언어'이다. 언어는 전 세계 곳곳의 나라마다 다르며 같은 나라 안에서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할지라도 그 사용 방법과 표현방식은 개인마다 다르다. 나는 같은 언어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표현의 차이를 보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빨갛다'라는 표현을 살펴보자. 사람들은 모두 빨간색을 보지만 어떤 사람은 이 색을 붉그스름하다고 말할 수도, 또 다른 사람은 개화한 지 얼마되지 않은 장맛빛이라고 말할 수도, 어떤 이는 시장에서 팔리는 사과 같은 색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또한 같은 붉은 색이더라도
디아스포라, 한 번쯤은 들어봤을 수도 있고 처음 보는 생소한 단어일 수도 있다. 디아스포라란 고향을 떠나 강제적으로 타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단어이다. 오늘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삶의 터전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한인 디아스포라는 일제강점기 때 증가하였는데 이주의 대표적인 장소로는 만주,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일본, 미주와 같은 곳이 있다.만주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국내 한인을 강제 이주시킨장소이며 국권을 상실한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한 곳이기도 하다.광복 후에는 80만여 명이 귀국했으며 잔류한 이들은 오늘날의 조선족으로 불리고 있다.다음으로 연해주와 중앙아시아는 소련, 일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스탈린이 강제로 이주시킨장소이며 오늘날의 카레이스키와 고려인으로 불린다. 중앙아시아는 홍범도 장군이 강제로이주당한장소이기도 하며 많은 민족 운동가들이 한인 자치 단체를 조직한 곳이기도 하다.1이렇듯 타의에 의해 타국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디아스포라들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당시의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바라본다면 그 누구라도 한숨을 지을 것이
본격적인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10월 29일에 일어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애도를 표하며 이야기를시작하도록 하겠다. 종종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피해자가 나타났을 때 그 피해자를 모욕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특히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의 댓글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에서부터 비롯된말이 피해자들을 겨누는 모습도 자주 마주한다. 이렇듯 사건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모욕하고 '네가 그런 동기를 만들었잖아, 왜 그런 행동을 해서, 왜 그런옷을 입어서, 왜 그곳에 가서그런 일을 당해'와 같은 말처럼피해자를 탓하고 배척하는 행위를 '2차 가해'라고 한다. 2차 가해는 성범죄 피해와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며 그 외의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근래에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2차 가해를 저지르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까닭도 인터넷을 통해 접하게 된 참사와 관련한사람들의 2차 가해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뉴스의 댓글을 보면몇몇이들이 이태원 참사 희생자에게 '네가 그곳에놀러 가서 일어난 일이잖아'와 같은 뉘앙스의 말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참사의 희생자 중에는 행사가 있었다는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많은 사람은동물의 권리에 대하여 고민하고 심지어는 동물을 지키고 싶어서동물을 위해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아예다른 곳으로 틀어버리기도 한다. 동물권이라는 단어 역시 1970년대 후반에서야 나타난 개념으로 인간이 아닌 동물도 인권과 같은 권리를 지녔다고 말하는 개념이다. 나는 이러한 동물권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룬 김한민의 '아무튼 비건'과 하재영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을 읽고 동물에 대하여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무튼 비건>이라는책은 비건인 저자가 우리가 비건을 해야 하는까닭과 현재 동물들의 상황, 그리고 사람들이 비건에 대해 말하는 정보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책을 읽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갖고 있었을비건에 대한 거짓 정보와커다란 오해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잘못된 생각은 '왜 굳이 우유나 달걀까지 먹으면 안 된다고하는 거지? 달걀은 괜찮은 거 아닌가?'와 '비건을 하면 맛없는 음식들만 잔뜩이고 엄청나게 참아야 한다던데?'였다. 책을 읽은 지금첫 번째 의문점부터 해결하자면 정답은 우유와 달걀은 생산해내는 과정에 있다. 우유를 얻기 위해선 어미 소를
만약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닌다면 Wee class (위클래스)라는 곳을 들어본 적 있는가? 위클래스는 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 위클래스에 계신 상담 선생님과의 시간 조율을 통해 상담 시간을 잡고 상담받을 수 있다. 내가 이 글을 작성하게 된 까닭은위클래스에 대해 알리고 위클래스에 관한 사람들의 인식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개선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흔히 많은 학생이 위클래스를 떠올렸을 때 마음에 상처가 있는 친구가 가는 곳, 정신에 이상이 있는 친구가 가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며 앞서 말했듯이 학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공간이다. 또한 위클래스에 가려면 엄청나게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위클래스는 그리 심각한 고민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대화가 나누고 싶을 때 위로받고 싶을 때 등 마음껏 찾아갈 수 있다. 내가 이리 확신을 지니고 위클래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시절 위클래스에서 또래 상담사로 지내며 여러 활동을 더불어 상담을 받았기 때문이다. 활동 당시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께서는 우리 또래 상담사들에게 모두
만일 누군가가 일제강점기 때 활동했던 시인의 이름을 물어본다면 많은 이들이 윤동주 시인이라 답할 것이다. 그만큼 윤동주 시인의 시는 많이 알려져 있으며 현재의 우리에게 당시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또는 은밀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 나는 일제강점기 시대의 시인인 윤동주 시인과 그의 작품에 대하여 말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다양한 시를 창작하다가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며 1945년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후 윤동주 시인의 죽음의 원인이 일제의 생체실험때문이라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윤동주의 사망 원인은 뇌일혈로 높은 혈압으로 인해 뇌혈관에 출혈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뇌일혈은 뇌출혈이라고도 불리며 대게 고령의 환자에게서 자주 발생한다고 하니 당시 젊은 나이였던 윤동주 시인이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사망한 것은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결정적으로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후쿠오카에 있던 사람들은 수상한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주사를 맞은 이들은 아프고 죽어갔으며 이는 일제가 생체 실험을 벌였다는 주장에 불을 붙였다. 나는 윤동주 시인의 시집인 '하늘과 바
많은 사람이 자유를 원했고, 많은 희생과 노력을 통해 자유를 찾은 국가와 개인이 늘어났다. 자유를 위한 노력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수많은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책은 소설가 N.H 클라인바움이 쓴 책으로 자유를 깨닫는 과정을 담았으며 독자가 그 의미를 고민해 보게 만드는 책 중 하나이다. 책은 엄격하고 통제된 교육을 받는 영재 고등학교인 웰튼 아카데미에 존 키팅이라는 국어 교사가 오며 시작한다. 웰튼 아카데미 학생들의 결정권은 부모에게 가 있으며 학생들은 자신의 의견을 지니고 결정하거나 판단하는 행위를 제한당한다. 그것이 학생들에겐 당연한 일이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존 키팅은 이러한 학생들에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가르치며 수업을 이어 나간다. 또한 학생들과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시를 읽는 모임을 통해 소통하며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의 의미를 깨닫고 행하게 된다. 책을 읽으며 나 또한 자유의 의미를 재정비해 볼 수 있었다. 대게 사람들은 자유를 떠올렸을 때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렇다면 자유에는 긍정적인 면만 존재할까
이꽃님 작가의<죽이고 싶은 아이>란 제목을 보고, 책의 두께를 보았을 때 그저 단순한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결말에 다다를수록 내가 알고 있는 진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책의 시작은 한 학교에서 서은이라는 학생이 죽은 채로 발견되며 시작한다. 유력한 용의자는 서은의 친구였던 주연으로 아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판이 그리 좋지 못한 아이였다. 이상하게도 주연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모두 주연이 범인일 것이라 확신한다. 처음엔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 확신했던 주연도 주변의 말들에 의해 점점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죽이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 책을 통해 평소 우리가 접하는 소문과 편견, 그리고 추측들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책 속에서 주연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의 확신에 찬 비난으로 인해 주연이 살인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 되었고 자기 자신조차도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범인 목격자의 증언은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정작 주연의 말은 듣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의 믿음이 한 학생을 살인자로 만들고, 타인의 죗값을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