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필자의 20번째 칼럼이다. 2년 동안 이어 온 청소년 칼럼니스트로서의 마지막 칼럼이다. 처음 칼럼니스트가 되기 위해 지원서를 쓰던 때가 기억이 난다. 평소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두려움이 있었다. 걱정했던 대로, 1년에 열 편의 칼럼을 기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남기는 데에는 많은 고민과 어려움이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끼기도 했고, 그만큼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활동을 마치는 지금, 더 좋은 글을 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렇게 완벽하지 못했던 글쓰기 여정이지만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칼럼에서는 글쓰기가 가진 매력에 관해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 칼럼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이 자신 있게 글쓰기에 도전해보면 좋겠다. 글쓰기의 가장 큰 매력은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훌륭한 작가들의 명언을 살펴보면, ‘고쳐쓰기’에 대한 내용이 참 많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수십 번 수백 번 주워 담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부담을 내려놓아
우리는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디지털 기기를 이용할까? 현대인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아침에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후 바로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디지털 기기는 거의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쉴 때는 기본이고, 이제는 공부도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서 하는 시대가 왔다. 많은 학생들이 노트북으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태블릿으로 필기를 한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수업도 온라인으로 듣기 시작하며 디지털 기기의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이러한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최근 자주 언급되는 ‘메타버스’라는 용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메타버스에 살고 있는가? 늦기 전에 디지털 지구-메타버스에 올라타라 김상균 저자의 책 ‘메타버스’의 표지에 있는 문장이다. 사실 처음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접한다면 대중교통인 버스가 떠오를 수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을 뜻하는 영어 단어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세계와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가상 세계를 의미한다.1 다시 말하면 디지털화된 새로운 세상이며, 또 다른
필자는 지난해 4월 경기도교육청 청소년방송의 칼럼니스트로서 첫 칼럼을 게시하였다. 그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던 코로나19에 대한 칼럼이었다. 칼럼니스트로 활동한 것도 벌써 2년이 되어가는데, 더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코로나19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우리나라에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겪는 사태에 당황했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받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등교가 여러 차례 미뤄지는 상황에서 방학이 늘어난다고 아무 생각 없이 좋아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사회를 상상하기 힘들어졌다. 마스크 없이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거리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던 때가 언제였나. 지금 이 칼럼을 적고 있는 시점에 필자는 자가격리 중이다. 자가격리 해제를 단 하루 남겨두고 있다. 처음 자가격리 통보를 받았을 때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한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황당하면서 억울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코로나19를 두려워하면서도 나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내가 자가격
“당신은 이것을 절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중 가장 크다”1 이와같은 제목을 본 적이 있는가? 필자는 인터넷을 이용하면서 수없이 보았다. 제목은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지만, 굉장히 대단한 것인 양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과연 실제 내용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대부분은 사람들이 제목을 보았을 때 가졌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이렇게 불분명한 제목 이외에 실제 내용을 반영하는 제목들 또한 ‘충격’, ‘경악’ 등의 단어를 포함하여 자극적인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낚시성 제목들은 이용자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제목만으로 일부 사람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기도 한다. 특히 낚시성 기사들은 SNS에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를 자주 사용하는 청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SNS에서는 공유와 전달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잘못된 정보가 확산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문제 의식을 가지고 칼럼을 쓰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모두 ‘클릭베이트’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클릭베이트는 2017년에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정식으로 등재된 단어이다. 처음에 제시한
코로나19로 여러어려움이 있었던 도쿄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모두의 걱정과 우려를 디디고 시작되었던만큼 터져 나오는 논란과 불만도 많았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있어 올림픽은 꿈의 무대이고,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노력해왔기 때문에 더욱 소중한 기회이다. 필자는 올림픽을 보면서 실제로 이들의 열정과 간절함을 느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무기력해질 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선수들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이에 이번 칼럼에서는 도쿄올림픽에 대한 다른 문제들은 잠시 제쳐두고, 피땀 흘려가며 노력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고자 한다. 2020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로 인해 1년 연기되어 2021년인 올해 열리게 되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는 가라테, 스케이트보드, 서핑 등의 새로운 종목도 추가되면서 관심을 모았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로는 232명의 선수가 29개 종목에 출전했다. 메달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참여해주었고 올림픽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파이팅이 넘쳤던 효자종목 양궁, 해설위원까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한 펜싱, 선수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돋보였던 육상 등 수많은 종목에서 멋진 경기가 펼쳐졌다. 모든 종목
미디어는 점점 발전하고, 사람들은 온라인 세상에서 활발하게 소통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미디어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피어오른 불안과 두려움이 혐오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 사람이 차별적인 말을 던지면 가벼운 마음으로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도 그러한 경험이 있다면, 이 칼럼을 제대로 읽기를 바란다. 아무리 가볍게 던진 말이라도, 그 말에 큰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한마디의 말이 가진 힘을 안다면 그 힘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보다는 대항을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칼럼을 쓴다. ‘혐오표현’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혐오표현을 “성별, 장애, 종교, 나이, 출신 지역, 인종 등을 이유로 어떤 개인이나 집단에게 모욕, 비하, 멸시, 위협 또는 차별과 폭력을 유도하여 차별을 정당화하고 조장 및 강화하는 효과를 갖는 표현”이라고 규정했다.1 혐오표현은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그 집단을 사회적으로 고립되게 만드는 등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 혐오표현은
‘천 개의 파랑’은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거머쥔 SF 소설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히 ‘SF’라고 정의하기에는 책이 담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필자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이 사회가,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내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사회에 적응하느라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작가가 말하길, 이 소설은 하나의 문구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야기는 많은 등장인물들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정확히 말하면, 휴머노이드 로봇 ‘콜리’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말 ‘투데이’도 등장한다. 동물과 로봇, 그리고 인간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배경은 2035년으로, 휴머노이드가 경마에 사용되며 경주마들이 더 빠른 속도로 달릴 수 있게 된 미래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는 ‘투데이’라는 말과 한 팀이다. 콜리는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소프트웨어 칩이 잘못 삽입되어 다른 휴머노이드 기수와는 조금 다르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고 엉뚱하지만 마음을 건드는 질문을 쉼 없이 던
코로나19로 우리는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등교하지 않고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면서 친구들과 나누는 즐거움도 줄어들었고, 코로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타인에 대한 경계는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나눔과 봉사까지도 포기해야 할까? 어려운 시기인 만큼 서로를 도우면서 차가워진 마음을 조금씩 녹여야 하지 않을까? 최근 코로나로 인해 대면 봉사활동에 제약이 생기면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더욱 줄어들었다. 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이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도 할 수 있는 언택트 봉사활동이 생각보다 많다. 필자는 더 많은 학생들이 걱정 없이 봉사했으면 하는 마음에 이 칼럼을 쓰게 되었다. 아래에서 소개할 세 가지 봉사활동은 모두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의미 있는 봉사활동이다. 이 칼럼을 읽고 더 많은 학생들이 봉사활동으로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길 바란다. ① 선플운동 선플 달기 운동은 전국의 교육청에서 인정하는 봉사활동이다. 이 봉사활동은 비방과 욕설로 가득한 댓글 창을 조금 더 따뜻하고, 깨끗하게 만들고자 하는 취지를 담고 있다. 악플을 한 번이라도 쓴 경험이 있다면 이 봉사활동을 통해 자신
최근 엄청난 주식 열풍이 불고 있다. 지난해부터 주식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주식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외국인 투자자가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국 주식을 팔며 급락세가 이어지자 이에 맞서 개인투자자들이 적극 매수하는 것을 의미1하는 신조어도 등장했다. 일명 ‘동학개미운동’이다. 외세에 대항하여 일어났던 동학농민운동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치열한 상황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주식이 도대체 뭐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빠지는 것일까? 필자는 사회 시간에 예금, 주식, 채권 등 여러 금융 자산에 대해 배웠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경제 파트를 공부하면서 이 내용을 접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예금과 주식을 한 번 비교해보자. 예금은 정해진 이자를 받기로 하고 금융 기관에 돈을 맡기는 상품이고, 주식은 투자자에게 회사 소유권의 일부를 주는 증서이다. 예금은 안전성과 유동성은 높지만 수익성이 낮고 주식은 수익성은 높으나 안전성이 낮다. 즉, 얻을 수 있는 이익이 한정되어 있는 예금과 달리 주식 투자로는 높은 수익률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투자하냐, 안전
추운 겨울, 따뜻한 코코아로 몸을 녹인 적이 있는가? 달콤한 초콜릿을 먹으며 행복을 느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러한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카카오의 비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필자도 한 권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 비밀을 잘 알지 못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잔인한 이면을 파헤치고 싶다면, ‘나는 초콜릿의 달콤함을 모릅니다’를 읽어보자. 타라 설리번의 책 ‘나는 초콜릿의 달콤함을 모릅니다’는 카카오 농장에서 피땀 흘리며 일하는 아이들에 대한 책이다. 원제는 ‘Bitter Side of Sweet’로 달콤함 뒤에 숨겨진 쓰디 쓴 현실을 의미한다. 이야기는 아마두, 그의 동생 세이두, 그리고 도시에서 온 하디자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마두와 세이두는 돈을 벌기 위해 농장으로 팔려 왔지만, 2년 동안 한 푼도 벌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살아간다. 카카오 열매를 할당량만큼 수확하지 못하면 두들겨 맞기 때문에 그들은 온몸이 아플 때까지 열매를 딴다. 그러던 중 하디자를 만나면서 함께 농장 탈출을 계획하고, 세 명의 아이들은 결국 탈출에 성공한다. 아마두와 세이두는 하디자의 도움으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정당하게 지급하는 농장에서 일하며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게 된다.
최근 ‘기본소득제’가 정치권의 뜨거운 이슈이다. 기본소득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제가 모든 구성원 개개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소득1이다. 기본소득은 기존 사회복지제도와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모든 구성원에게 조건 없이 무조건 지급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들은 기본소득제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보인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들이 많은데, 모두가 똑같은 돈을 지급받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제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소득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떠오르는 핵심 키워드, 기본소득제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 모두에게 똑같은 돈을 준다는 것, 과연 옳은 일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평등을 주장해왔지만, 현대에 와서는 ‘평등(Equality)’과 ‘공정(Equity)’을 구분하며 공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평등은 개개인이 가진 특성에 상관없이 모두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이고 공정은 다른 것은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정성을 위해서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더
우리는 이제 종이 신문을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를 찾아보는가? 그것도 아니다. 신문, 방송 뉴스뿐만 아니라 포털 사이트의 뉴스조차도 거의 보지 않는 시대가 왔다. 이제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정보를 얻고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이들과 교류한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뉴미디어가 장악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발전하는 뉴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올드미디어를 완전히 버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것들이 등장해도, 기존 미디어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한다. 하지만, 올드미디어의 장점을 강화하고 단점을 보완한 매력적인 뉴미디어는 분명 이용할 가치가 있다. 먼저, 가장 대표적인 뉴미디어를 알아보자. 요즘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는 넷플릭스이다. 코로나19로 ‘집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러한 영상 콘텐츠의 수요가 더욱 늘어났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물론 편하게 밖에 나갈 수조차 없게 된 사람들이 집에서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넷플릭스는 현대인들이 집에 있을 때 꼭 필요한 요소가 되었다.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넷플릭스만의 오리지널 콘텐츠들이 가득
코로나19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지금, ‘28’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정유정 작가는 엄청난 필력으로 전염병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빨간 눈 괴질’이라고 불리는 전염병이 퍼진 28일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특한 점은 이야기가 5명의 인물과 1마리의 개의 시점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6개의 시점이 서로 어우러져서 하나의 대서사를 이룬다. 빨간 눈 괴질은 치사율이 매우 높은 전염병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더욱 공포에 몰아넣었다. 눈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하면 죽음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눈이 변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또한, 빨간 눈 괴질의 가장 큰 특징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점이다. 이 사실이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일깨웠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전염병을 옮길지도 모르는 개를 길가에 버렸고 몇몇은 집단으로 학살했다. 이 책에서 쿠키, 스타, 링고라는 세 마리의 개가 중요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개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소수의 사람이 저지른 잘못이 다른 무고한 사람에게 화살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가장 슬픈 장면 중 하
인터넷 기사나 유튜브 영상의 댓글을 보면 사이버 세계 속 익명성의 폐해를 단번에 느낄 수 있다. 직접 입에 담기도 거북한 말들이 수많은 댓글에 당연한 듯이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악플’이다. 이러한 악플은 주로 연예인에게 향한다. 남들에게 자신을 많이 내보여야 하는 직업이기에 이들은 악플러의 표적이 된다. 누군가는 연예인이라면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악플은 어떤 이유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이고 연예인은 그것을 감당할 의무가 전혀 없다. 최근에는 많은 유튜버가 악플의 피해자가 되었다. 유튜브 시청이 일상생활로 자리 잡게 된 시대이기 때문에 유튜버들은 많은 사람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 그 관심이 적대감과 분노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얼마 전 유튜버들의 ‘뒷광고’ 논란이 불거지면서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 몇몇 유튜버들은 분노에 찬 악플을 견디지 못하고 방송 생활을 완전히 접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뒷광고를 한 유튜버들의 잘못은 분명하다. 시청자들을 기만하고 속이는 행위를 했으며 이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인신공격과 모독은 처벌의 방법이 될 수 없다. 잘못에 대한 피
한국은 난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 우리가 난민을 어떻게 여기는지는 과거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2018년,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하여 난민 신청을 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찬성 입장과 반대 입장으로 나누어져 대립했다. 하지만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청원에 7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하는 등 반대 입장이 매우 강했다. 결과적으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단 2명뿐이었다. 물론 이 당시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예멘 난민 수용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반대 이유는 난민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다.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 난민 중 대부분이 이삼십대의 건장한 남성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들과 문화적 사고방식이 다른 난민들로부터의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예멘 난민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해외 여러 나라에서 난민들이 범죄를 일으킨 사례가 많으며 이는 종교 및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이유가 난민 배척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은 욤비」는 난민에 대한 극적인 소설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