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뉴스

태실과 장태

우리만의 소중한 문화

우리나라만의 문화, 태실에 대해 소개를 해보고자 한다. 태반이나 탯줄과 같이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조직을 라고 하는데,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리의 선조들은 가 지닌 생명력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다. 아기 배꼽에서 떨어진 탯줄을 한지에 곱게 싸고 명주실로 묶어 안방 높은 곳에 걸어두었다. 아이가 아프면 건조된 태를 잘게 썰어 달여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믿음 덕분에 좋은 항아리에 태를 담아 좋은 땅에 묻는 장태 풍습이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계층별로 태를 처리하고 보관한 방법이 다르고 다양하였다. 먼저 왕실은, 태실을 만들어 왕자녀의 태를 장태했다. 장태의 절차는 건태, 소태에 비해 상당히 복잡했다. (건태는 태를 깨끗이 말린 후 처리하는 것, 소태는 태를 태워 처리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은 태실은 쓸 수 없었지만 자손의 태를 태항아리에 담아 집안의 산인 가산에 안장했다. 산에다가 태를 묻는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산을 우리 생명의 근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민간에서의 태 처리 방법은 지역마다 달랐다. 태를 불태워 강물에 띄워 보내거나 산이나 땅에 묻었다. 해안가에선 바다에 띄우고, 산간지방에서는 산에 묻고, 어촌에서는 바다일을 잘하라고 갯벌에 묻기도 한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장태보다는 소태, 건태, 물에 떠내려가게 하는 수중태의 방식 등을 사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태실의 역사는 삼국사기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신라시대 김유신의 장태 기록이다. 이처럼 기록은 7세기 후반부터 찾아볼 수 있으나 그 역사는 훨씬 오래전부터 내려져 온 것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 국왕의 태실지를 <경남 김해시 장유면 응달리 태봉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왕실의 안태 제도는 고려시대에 더욱 정비되고 정착되었다고 한다. 신라말, 고려 초에 풍수지리사상이 성행하였고, 정부는 안태를 위한 관리도 임명하였으며 여러 가지로 태실의 제도적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는 왕실에서 제도적 태실문화를 갖추고, 사대부 집안에서도 장태문화가 자리잡았다는 것을 조선 전기 이문건이 쓴 양아록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실이 필자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다. 바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서삼릉과 세종대왕자 태실 때문이다. 사적 200호로 등록된 서삼릉에는 일제강점기 일본 통치자들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주묘 등이 현재 위치에 다 한데 모여있다. 일본은 서삼릉에 전국의 태실을 무성의하게 모아놓으며 공원 묘지처럼 쌓아 놓아 그 품격을 잃게 하였다. 이 같은 행동은 왕족의 품격을 깎아내리고 백성들에게 조선의 멸망을 확인 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처럼 서삼릉에는 조선시대에 유실되어버린 단종,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경종, 철종, 고종의 태실 외 모여진 49기의 태실과 함께 일본인에 의한 아픈 역사를 한데 담고 있는 중요한 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태문화가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귀한 문화임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다. 다른 문화권의 독특한 문화들보다도 한국을 먼저 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리 선조들이 실제 탯줄과 태반이 산모와 아이에게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태를 귀하고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에서 우리나라의 정신과 문화는 깊은 과학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만의 태실문화에서 엿볼 수 있는 선조들의 생명존중 사상은 줄기세포 복제, 사용에 대한 윤리문제와 인간복제 등 생명 윤리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는 요즈음 다시 한번 찾아보고, 이해하고 되새길만하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 조선의 세계적인 문화유산 태실 –김득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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