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말있어요

기억되는 자는 죽지 않는다

가끔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물을 접할 때에는 만약내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상념에 빠질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김구 선생처럼 아니면 이완용처럼 말이다. '무엇을 위한 생을 선택할 것인가'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물음은 인간의 본질까지 염두 해두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가 가치 있고 없고는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이 둘은 극과 극의 전혀 다른 생을 살아본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다.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의 대부분은 본능에 따르며 살아남기 위해 또는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노력하고 편안함을 추구한다. 특히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승자의 입장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뒤떨어지는 생명은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논리로 설명한다. , 약육강식의 논리로 포장하여 자신들만의 이상을 좇아 거창한 표현으로 에두르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고 보면 이완용은 마치 자기가 조선의 지배자 입장에서 스스로 하는 행위가 질서 잡힌 행위이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악마에게 바친 꼴임에도 불구하고 타국의 대의명분을 위해, 전쟁을 위해 희생하기를 바랄 수 있었을까.

 

윤리라는 것은 불쌍한 이를 보면 돕고 싶은 마음이 솟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타인에게도 비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런 면에서 그에게 윤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김구 선생을 보자.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지키려고 하는 그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도 우리처럼 주어진 시간이 두 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재가 소중했을 텐데 말이다. 그 해답을 묘하게도 나는 고대 로마 노예 반란의 지도자 스파르타쿠스의 기억되는 자는 죽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찾았다


동양과 서양은 역사적 배경은 다를지라도 그 추구하는 가치는 비슷하다는 반증인지도 모르겠다. 생존을 넘어서는 가치를 좇고 곧은 선택을 하며 영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김구 선생과 스파르타쿠스의 육체를 벗어날 수 있었던 그들의 의지와 신념에 대해 다시금 곱씹게 된다. 추상적이지만 높은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김구 선생을 보며 그가 불행했을지라도 영원의 가치를 선택한 보다 나은 삶은 아니었을까. 인간의 본질, 그것은 그처럼 숭고한 희생은 인간만이 해낼 수 있으며 윤리가 바탕이 되고 죽음이 위대할 수 있는,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광복 이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수많은 세계질서 속에서 지혜로운 결단 하나하나를 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인생을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청소년 중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은 듯 현재 학교생활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귀한 희생 덕분에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이어져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에게도 그들처럼 삶의 순간순간이 우리를 만들어가는 시점이 찾아오고 또 다음 세대를 위해 그들의 정신을 다듬어 물러줄 준비를 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충분히 사색하고 가치 있는 삶을 준비하고 완성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만약 그 시대를 내가 살아내고 있다면, 그리고 광복을 맞이했다면 거창한 그 어떤 의미부여 없이 나는 기꺼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거리에, 모두의 호흡 속에, 숨결 안에 그들에 아름다운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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