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말있어요

펜으로써 나라를 수호하신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시 Ⅳ

이상화의 생애와 그의 시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에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에서 4형제 중 둘째로 출생하였다.


이상화는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학하였다. 1915년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8년 경성중앙학교를 중퇴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여 한동안 은신하였다. 1921년 동료의 소개로 만나 <백조>에 참여하게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2년간 일본 동경의 아테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 중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칼럼과 글을 국내의 잡지사로 보냈다. 1923년 동경 대지진이 나자 불령선인으로 몰려 일본인 폭도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겪었으나 어느 일본인의 배려로 귀국하였다.


1925년 김기진 등과 함께 문학연구단체 파스큘라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33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조선어와 영어, 작문을 담당하였다.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이상화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 해 11월 말 경 가석방되었다. 다시 대구로 데려와 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 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사를 작사하였다. 1940년 말 교사직을 그만두고 집에서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위암과 폐결핵,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인해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숨졌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된 시로 이상화의 후기 사상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저항의식과 함께 자연에 대한 애정이 서정적 정조로 형성화되어 있으며 자조적이고 회의적이다. 그 시대 민족의 비애를 나타내 저항의식의 응결된 투명성보다는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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