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은의 영화 칼럼] 당신이 사는 세상이 모두 거짓이라면

 

여러분이 사는 세상이 모두 거짓이고 짜인 각본이라면 믿으실 것인가? 오래전에 나온 작품이지만 아직까지 끊임없이 사랑받는 트루먼쇼는 내가 오늘 소개할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충격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한 인간의 강렬한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울컥함과 타인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인간에 본능에 관해 얘기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 이 세계는 하나의 어항이고 한 남자의 일생은 어항 속 물고기처럼 투명하게 노출된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은 무엇인가? 한 남자의 일생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해 전 세계에 방영되고 있다는 쇼, 바로 ‘트루먼 쇼’이다. 심지어 지나가던 행인, 그의 아내, 직장 동료, 그의 절친마저 모두 연기자였다. 관객들은 트루먼이 그의 나약한 모습을 집어던지고 탈출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트루먼은 자기 주변의 현실이 이상하다고 느꼈던 점은 많았다. 갑자기 하늘에서 조명 등이 떨어지고 죽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트루먼의 이름을 아는 등 쇼 제작자들의 실수가 있었다. 이제 한 남자의 외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그는 모든 면에서 불안했을 것이다. 어느 날, 트루먼은 실비아라는 자신의 첫사랑을 만나려고 피지섬에 가려고 했다. 하지만 연출가 크리스토퍼는 그 섬에는 카메라가 없다는 이유로 마치 전지전능한 신처럼 인공 폭풍을 만들어 그를 돌아오게 하려고 시도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온몸을 던지며 저항하는 트루먼을 이길 수 없었다. 험난한 폭풍을 이겨내고 트루먼의 배가 다다른 곳은 스튜디오의 한쪽 파란 벽이었다. 나는 페인트 벽에 손을 대고 있는 그의 손과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한 개인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짓밟은 한 쇼에 대한 비판을 표현하고 있다. 관음증 환자란, 내 사생활을 보여주기 싫지만, 남의 사생활 엿보기를 은근히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슈퍼맨이 돌아왔다’라는 프로그램은 어린아이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시청자들이 즐거움을 얻게 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샤워하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과연 어린이들에게는 촬영에 대한 동의를 구한 것일까? 이 프로그램도 트루먼 쇼와 같이 동의하지 않은 사생활이 노출되진 않는가? 

 

한 인간의 강한 자유의지와 타인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을 나타낸 영화, 트루먼 쇼. 한편으로는 트루먼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을 살아갈 때 포기해서는 안 되며 더욱 단단해져야 한다. 트루먼은 비록 만들어진 삶 속에서 살았지만, 그의 눈빛에서부터 나오는 위대한 자유의지, 즉 자신의 정체성을 향해 온몸을 던지며 저항하는 트루먼을 감독과 시청자들 그 누구도 꺾지 못했다. 세상에 휘둘리며 자신을 작은 우물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큰 파도 위에서 우리는 끝없이 정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트루먼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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