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채현의 시사 칼럼] 우리는 '프로불편러'가 되어야 한다

현실적이라는 말을 허울좋은 핑계로 삼지 마라

세상이 시끄럽다. 악에 받친 절규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누구는 저래서 힘들고, 누구는 이래서 힘들다고 한다. 뉴스를 보면 정계의 갈등으로 시끄럽고, 친구와 수다를 떨면 입시로 힘든 이야기뿐이다. 온갖 불만과 잡음으로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일단 지금처럼 현실의 불편에 순응하고, 고통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한다.

 

“불편하면 자세를 고쳐 앉아라.” SNS에서 이 말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모든 사회의 문제는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한다. 그 균열이 눈을 가린다고 해서 메꿔지겠는가? 불편한 100명이 자세를 고치는 것보다, 불편의 원인을 제거해 1,000명이 행복해지는 편이 훨씬 낫다. 후자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사회가 발전하는 지름길이 된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사실 답은 간단하다. 공감하는 사회가 되면 된다. 내 옆의 가족과 친구를 넘어서야 한다. 길거리에서 마주한 아장아장 걷는 어린이, 인터넷에서 대화를 나눈 이들,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까지. 그 누구도 비난하지 말고, 동정하지 말고, 그저 그 상황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공감하면 된다.

 

그 마음의 실현이 바로 ‘프로불편러’가 되는 일이다. 이들은 그저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불편함을 없애자고, 편한 세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본인의 불편에만 국한되지도 않는다. 타인이 느끼는 불편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 불편까지도 제거하자고 이야기한다. 그 소리가 당장은 짜증스럽게 들리겠지만, 누구보다 희망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적자생존’ 원리의 잘못된 적용이다. 적자생존은 말 그대로 가장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원리가 우리 사회에선 잘못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약자는 생존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사회에서 도태되고 지워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그러나 강자만 생존할 수 있었다면 인간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생각해보아라. 우리는 동물계에서 유달리 강한 동물이 아니다. 피부도 얇고, 손발톱이 날카롭지도 않다. 달리기도 느리다. 그런 인간이 지구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건, 서로 협력했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적합한 자는 다름 아닌 협력하는 자다. 그렇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서로에게 ‘강자생존’의 원리를 들이미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모든 협력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강자생존’의 원리를 들이미는 사람들은 그것이 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현실적으로 약자를 끌어안으면서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현실적이라는 말이 불편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는지 의문이다. 현실적이라는 말을 허울 좋은 핑계로 써선 안 된다. 타인의 불편에, 특히 약자의 불편에 공감하고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물론 모든 불편을 느끼며 늘 절망하고 괴로워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불편에 귀 기울이고, 조금 느린 사람을 기다려주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될 때, 우리 사회의 냉정함, 차가움, 어둠은 사라지고, 다정함, 따뜻함, 밝음이 싹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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