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린의 미술 칼럼] 전쟁이 남긴 예술

실존주의 미술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각성, 부단한 평화를 위한 노력도 전쟁을 뿌리 뽑진 못했다. 먼 나라의 일이지만 우리는 변화하는 경제 지표, 두드러지는 외교 문제 등을 통해 전쟁을 느낄 수 있다.  전쟁은 돈, 안보, 국제 사회의 세력 균형 등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다수가 주목하는 부분도 그와 같다. 하지만 전쟁을 조금만 더 가까이서 바라보자. 무고한 개인들에게 자행되는 살상과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전쟁에서 인간은 철저히 소외당하기 마련이다. 국가적인 과업 앞에서 개인은 국가의 부품과도 같다. 

 

이처럼 부품으로 전락한 개인에 주목하는 철학 사조가 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발달한 실존주의는 거대한 폭력 앞에 선 개인의 약함을 드러냄과 동시에, 온갖 부조리로 가득 찬 생을 꿋꿋이 살아가는 강인한 존재로 개인을 조명한다. 실존주의는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한 시대의 흐름으로서 나타났다.

 

 

그중에서도 실존주의을 담은 예술 작품들은 전쟁 속 개인들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트 자코메티는 실존주의를 작품으로 녹여낸 대표적인 미술가이다. 그는 세계대전과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직시하고 실존적 상황에 놓인 인간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위 사진은 그의 대표작인 '걷는 사람'이다. 팔 다리가 기괴하게 길고 말라비틀어진 모습의 인간은 자코메티가 묘사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이는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지만 어딘가 결의에 찬 모습이다. 조각은 한정된 공간인 석판 위에서 질퍽거려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이끌고 일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한 폭력과 부조리가 가득한 생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하는 고독한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프랑스 출생의 미술가인 장 포트리에는 나치 군대가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소리를 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인질 연작을 제작했다. 그는 종이에 석고를 바르고 긁어내는 등 독특한 질감 표현을 통해 개인이 끔찍한 고통 그 자체를 표현함으로써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냈다. 앙드레 말로는 그의 작품을 '고통의 상형 문자'라고 표현했다.

 

예술은 약하디 약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항변 방법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거대한 폭력과 부조리를 마주할지라도 꿋꿋이 살아간다. 실존주의를 담은 작품들이 아름다운 이유이다. 우리는 위 같은 작품들을 통해 전쟁의 극단적 잔인성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다. 전범국은 집단이란 껍데기 속 '인간' 을 잊어선 안된다. 국가적 규모의 폭력과 학살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개인의 말살은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난다. 그것을 외면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집단의 부속품으로 남을 지도 모른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나의 유한성을 직시하는 것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 될 것이다. 생를 꿋꿋이 견뎌나가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내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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