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민의 독서 칼럼]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생각1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바라보며

'인간 실격’으로 다자이 오사무를 처음 만났다. 작품에서 인간으로 자격을 잃은 자기 고백적 발언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인간이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욕구일 것인데 스스로 이를 부정하는 말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48년에 발표된 ‘인간 실격’은 그 분위기가 우울하고 비관적이라는 첫인상으로 처음부터 그를 만나는 것이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작가 다자이 오사무를 진하게 느낄 수 있어 더 인정받는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물론, 작품 속의 요조에 의한 표현이지만 그의 삶을 살펴보자면 요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아마도 처음 작품으로 만난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더 신경이 쓰였던 것 같다. 아마도 나에게 스스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게 됐다.

 

처음부터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도 그의 생각과 정서를 그대로 이해하거나 느끼는데 부족하다. 다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작품에서 그의 생각과 정서를 따라가다 보면 나와 다른 그의 세계를 좀 더 느끼게 되고 내 생각도 깊어지고 확장되는 듯 해 기분이 꽤 좋아진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답답한 나의 상황을 환기하는 몇 가지의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부유층 가문에서 열 번째로 태어난 다자이 오사무.  자식이 많은 가정환경으로 어머니의 손길에 의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유모의 보살핌으로 자랐다.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아버지 덕분에 태어날 때부터 그는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했던 그는 학교에서 좋은 옷차림과 특별한 대우를 받는 등의 차별된 대우와 시선은 오히려 부담스럽고 죽음을 생각할 만큼 혐오감을 느끼게 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리는 부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를 생각하면 세상에서 경험하는 많은 시선이 너무 힘겨웠을 것도 같다. 어쩌면 기질적으로 섬세하고 예민했기에 주변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하게 되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을 스스로 긍정적으로 처리할 내면의 힘이 취약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인지 그의 성장 과정은 평범하지 못하고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청년기에 문학에 빠진 그는 중학교 때부터 동인지를 창간하는 등 적극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도쿄대학 불문과에 입학했지만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경제적 혜택으로 느끼는 죄책감은 자본주의로 인한 불평등에 반하는 마르크스에 심취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좌익활동을 모의하는 등 그 사상에 더욱 깊이 빠진다. 그러나 좌익활동 끊지 않으면 경제적 활동 지원하지 않겠다는 가족의 반대에 저항하지 못하고 바로 포기하게 되는데 이 지점에서 나는 그에 대해 한번 생각하게 된다. 집안의 경제적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을 바라봤을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이 거부한 세상에 순응하는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바라보며 자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더 강화되었을 것 같다.

 

나약한 자기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로 인한 고통도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간 것인지 삶의 후반기의 작품들에서 그가 느꼈을 부정적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어 보인다. 그 대표작이 인간 실격으로 작품의 주인공 요조를 보면 다자이 오사무가 보인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못난 자기로 산다는 것은 아마도 하루하루 견뎌내고 살아낸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요조 스스로 자신은 인간으로 자격을 잃은 자기 혐오적 발언에서 처절함과 혼자 감당했을 그의 고독함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의 인간관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그는 어떤 인간이 되고 싶었기에 자신을 인간으로서 자격을 잃었다 한 것인지. 혹시 자신의 그 기준에 너무 높고 완벽했기에 오히려 시도도 못 하고 좌절한 것도 생각해 본다. 나의 이상적 자아를 바라보며 오히려 현재의 내가 위축되고 세상으로 나갈 자신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과도한 타인에 대한 의식이 점점 자신을 예민하게 하여 결국 내면의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다자이 오사무.

 

자기 삶에 나를 주인공으로 하지 못한 삶은 공허할 것도 같다. 그래서 그는 살아가기 힘들었던 것일까. 특이한 것은 그의 죽음 앞에는 매번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처음에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어렵다. ‘홀로 가는 길마저 외로워지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그가 경험했을 외로움이 느껴져 안타까웠다. 자기를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기혐오로 고통을 느꼈던 다자이 오사무. 그러나 그의 삶을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처리했던 그의 행동까지 나는 동의 할 순 없다. 그의 내면에 쏟았던 고통으로 무장된 에너지는 용기를 내는 데 조금이라도 사용했다면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주인공의 회피적인 성향에 변화가 있을 것도 같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만의 내면세계가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기에 나는 그의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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