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연의 역사 칼럼] 광해군의 리더쉽

역사속의 패자 광해군의 재조명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토대로 시대적 배경과 인물 중심의 다양한 시선으로 봐야하며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의왕 중에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며 폭군으로 알려졌지만 왜 현대에 들어서 재조명받으며 평가가 바뀌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광해군은 제14대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592년 5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으며 당시 18세인 광해군은 급하게 세자로 책봉되어 전쟁의 지휘권을 넘겨받고 분조를 이끌게 됩니다.1 방계출신 콤플렉스가 있어서 적장자만을 기다리던 선조는 마지못해 후궁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광해군은 아버지를 대신해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를 돌며 의병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로하며 군량미를 확보하는 등 성공적인 분조 활동을 해냅니다. 세자의 교육도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아버지의 믿음도 없이 전쟁터로 내몰린 광해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고등학생이 전쟁의 지휘권자로 참여하게 된 무서운 상황입니다. 이순신의 계속되는 해전 승전보와 자발적인 의병 활동, 그리고 명나라군의 참전 등으로 7년간의 임진왜란을 극복하며 광해군은 세자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게 되고 전쟁 영웅이 됩니다. 선조는 도망을 선택했지만 광해군은 용기를 냈고 아버지와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빠르게 북진해오는 왜구에게 대항해 성공적으로 분조를 이끈 광해군의 업적은 분명히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당시 나라의 진정한 리더는 광해군이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후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지지하였으며 광해군은 전란 중 임시였다며 세자임을 부정합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으로 백성의 지지가 높아진 것에 대해 선조의 질투가 심했으며 이는 부자간임에도 정치적 견제로 이어집니다. 부모의 사랑과 지지는 시대를 막론하고 꼭 필요한 것인데 광해군은 아버지로부터 부정당했으니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광해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행 중 다행으로 영창 대군이 3살이던 해에 선조가 승하하였고 영창 대군이 너무도 어렸기에 왕세자 광해군이 결국 어렵게 35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15대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광해군은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갈등과 임진왜란이라는 시련, 왕세자의 위태로움과 불안을 겪었습니다. 현대를 사는 청소년들과 시대적 차이는 있으나 부모와의 갈등과 입시 전쟁, 그리고 미래에 대해 불안함은 비슷한 성장통을 앓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광해군은 재위 기간에 대동법을 시행해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 부담을 덜어주었으며 유배 중이던 허준을 죽이지 않고 불러들여 동의보감 편찬을 지원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정책인 실리외교를 추진해 전쟁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 그리고 조카인 능창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였으며 궁궐의 재건 등 무리한 토목공사가 강행되었고 대북을 지지하면서 이이첨 일파의 독주와 부정부패를 책임져야만 했습니다.2  

 

광해군이 계모를 폐위하고 정적인 동생을 죽이는 일은 왕권 강화를 위해 했던 일이며 같은 이유로 태종도 왕자의 난을 일으켜 많은 형제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폐모살제의 명분으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 역시 후에 아들 소현세자와 며느리 세지빈 강 씨를 죽이는 일이 발생합니다. 광해군이 좋아했다고 알려진 궁궐 짓기는 백성을 도탄에 빠트린 실수인 것이 분명하지만 전란 후의 복구과정에서 일정 부분은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 외교는 그 당시 성리학 윤리관에 어긋나서 철저히 외면받지만, 명·청 교체 시기에 광해군은 이념보다는 나라와 백성 중심의 실리외교를 하게 된 것이며 실제로 광해군 집권 중에는 명과 후금 양쪽의 관계를 잘 이끌었습니다. 광해군이 분조를 지휘하며 임진왜란을 직접 겪었으니 전쟁의 참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며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중립 외교를 하며 실리를 얻고자 한 것은 아니였을까요? 늦게나마 중립 외교가 긍정적인 평가로 바뀌고 있으며 세자 시절의 공헌과 집권 당시의 업적도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광해군은 영화 등으로 제작되어 성공하였으며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란 중에 선조와 광해군의 선택은 달랐으며 광해군은 이념보다는 실리에 따라 동아시아의 불안한 국제 정세와 명과 청, 그리고 일본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데 노력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성리학의 이념에 갇힌 조선보다는 현재에 맞는 시대를 앞선 리더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철저하게 외면받았던 중립 외교가 지금에서야 인정받는 이유일 것입니다.  


인조반정은 광해군의 집권 후기의 실정도 있지만 광해군에 의해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인조의 개인적인 복수심과 북인들의 독주에 밀린 남인과 서인 신하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이루어진 반정으로 광해군의 기록은 인조반정의 승리자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 외교를 포기하고 명은 가까이 후금은 멀리하는 친명 배금 정책을 펼치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패배하게 되면서 우리 역사상 최대의 굴욕인 삼전도 굴욕을 당하며 이후 조선은 청의 간섭을 받게 됩니다. 중립 외교는 인조반정의 명분이었으나 인조가 전쟁에 패하면서 주장하던 친명 배금을 뒤집고 후금(이후 청나라)을 섬기게 되면서 명분마저 잃고 조공을 바치고 세자와 백성까지 볼모로 보내며 임진왜란 이후에 안정화되고 있었던 국가 기반과 경제를 다시 약화하게 됩니다. 

 

인조가 광해군처럼 중립 외교를 했었다면 조선의 백성들이 전쟁으로 고통받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선조와 인조는 무능하여 전쟁을 막지 못했고 수습도 못한 최악의 왕입니다. 광해군이 선조 다음 왕으로 재위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란 힘든 환경이었고 광해군 다음 왕인 인조는 반정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광해군을 명과의 사대를 저버린 파렴치하고 폐모살제를 한 잔인한 군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들을 반영해 보면 광해군은 기록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며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것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광해군은 1608년부터 1623년까지 15년 재위하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강화도에서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이 배 되었고 힘든 18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년 7월 67세의 나이로 제주도에서 죽었습니다.3  광해군은 유배 중에 부인과 아들 며느리를 모두 먼저 보내고 홀로 쓸쓸하게 여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재위 기간보다 길었던 유배지에서의 오랜 시간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들었을까요. 역사 속에서 패자의 삶은 불행만이 남겨지는 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아들이었고 신하들에게도 배신당한 왕이었으며 역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평가하고 있지만 실제 연산군과 같은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재평가는 대부분 세자 시절과 집권 초기에 국한되며 집권 후반의 광해군은 실정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으며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지만 격변하는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이므로 다양하게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어려웠던 성장기를 겪게 되면서 리더의 능력을 끝까지 발휘하지 못했지만, 동정할 수 없는 건 성장기의 고통과 힘겨움에 굴하지 않고 왕에 오른 후에도 끝까지 성군으로 남은 정조 같은 리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더의 덕목은 시대가 변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좋은 리더는 신념이 확고하며 능력 있고 신뢰와 소통을 기반으로 책임을 수행합니다. 과거 수직적 관계에서의 리더는 타고난 일부의 사람만이 리더가 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수평적 관계의 리더를 지향하며 누구나 리더가 될 수 있는 시대로 발전하였습니다. 청소년이 리더에 대해 교육을 받는 것은 타인의 기대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활 수행이 아닌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키워가는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역사 공부는 세상과 리더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이야기 지침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며 우크라이나의 민간인 피해가 많은 상황입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공격이지만 러시아는 원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막지 못한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책임 또한 가볍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조와 인조 같은 무능한 대처가 아닌 광해군처럼 주변국들의 정세를 잘 살피고 실리 외교를 통해 전쟁을 극복해내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리더십을 기대해 봅니다. 더불어 UN과 각 나라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며 타협을 통해 러시아는 전쟁을 멈추고 민간인의 피해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기원합니다. 

 

참고 및 인용자료 출처

1.인용, 저자-설민석,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p304
2.참고 https://blog.naver.com/merry2274/221762087934
3.인용, 저자-설민석,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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