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초 : 이채원 통신원] 내가 소개하는 용문사와 용문 5일 시장

 

가을이 오는 길목, 기자와 기자의 가족들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를 찾았다. 두산백과에서 찾은 용문사에 대한 설명은 이러하다.  “용문사는 913년(신덕왕 2) 대경 대사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우왕 때 지천 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절집이 304칸이나 들어서고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모일 만큼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때 전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당시 용문산과 용문사는 양평 일대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는데 이에 일본군이 1907년  8월 24일 용문사에 불을 질러 사찰의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 되었다.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취운(翠雲)이 사찰을 소규모로 재건하여 유지해 오던 중 그마저 6 ·25전쟁 때 파괴되어 3칸의 대웅전과 관음전 ·산령각(山靈閣) ·종각 ·요사(寮舍) 등만 남게 되었다. 1982년부터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 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또한 경내에 수령이 1,1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는 마의태자가 심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문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관람료를 내고 들어서면 넓은 공터와 함께, 이곳저곳에 사진 찍기 좋은 스폿이 조성 되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용문에서 보내신 엄마가 그 시절 소풍으로 왔던 이곳은, 온통 잔디 언덕으로 된 넓은 공터였다며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여 옛날 얘기를 해주셔서 더 재미있었다. 절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산새 소리와 계곡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오르면 힘이 들어질 때 쯤 용문사가 나온다. 용문사는 1100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12명의 성인 남성이 팔을 벌려 안아야 안을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마의 태자는 나라를 잃고 죄인처럼 이곳을 지나면서 왜 이 은행나무를 심었을까? 그 나무가 1100년이나 살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신라는 멸망했지만 은행나무는 살아남았다. 10월 중순인데도 늦더위로 더 늦어졌다는 가을 때문인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노란색 은행잎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푸른 초록색도 건강해 보여 좋았다. 은행나무 옆엔 아주 큰 철제 피뢰침이 있었는데 혹시나 은행나무가 번개에 맞지 않도록 만들어진거라고 한다. 절을 둘러보고, 연못 속 돌장식에 동전도 던지며 소원을 빌었다.

 


산행을 해서 그런지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용문 5일 시장(5,10일)을 갔다. 용문역이 전철로 개통 되면서 서울에서도 아주 편하고, 가깝게 오갈 수 있어 시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차장에 차들이 가득해 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차를 대고 시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우선 용문 시장 입구에서부터 시장 끝까지 한번 훑어 지나가며 무엇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각종 젓갈과 밑반찬을 파는 곳, 생선이나 과일을 파는 곳, 약재들을 파는 곳, 호미, 괭이 같은 철물을 파는 곳, 떡볶이, 순대, 수수 부꾸미 처럼 먹을거리를 파는 곳 등 눈길을 끄는 곳들이 많았다. 기자는 뻥튀기를 파는 곳을 봐두었다가 샀다. 엄마는 김치를 만들 새우젓과 아빠가 좋아하시는 낙지 젓갈을 사셨고 아빠는 갓 튀겨진 도너츠를 사셨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정말 유행인지 아동 옷을 파는 곳에 녹색 츄리링이 걸려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시장을 모두 둘러볼 때쯤 비가 쏟아졌다. 그때까지 안개도 자욱하게 끼었는데 다음에 용문사에 갈 때는 맑은 가을 날씨에 노란 은행잎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를 보고, 숲속을 걷고, 활기찬 시장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눈이 오면 온대로, 꽃이 피면 꽃이 핀대로 아름다운 용문사와 정겨운 용문 시장을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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