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드림의 사회학 칼럼] 사랑의 혁명

저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 사랑이 사라진 것 같다. 물론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인 간의,  친구 간의 사랑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겠지만 그 사랑은 거기에 머물러만 있는 것 같다. 사회로 눈을 돌리면 그곳에 너무나 이성적이고 실리적인 것들만 가득 찬 것 같다. 우리 사회에 사랑이 어떤 쓸모가 있는지, 개인 간의 사랑이 어떻게 외부로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내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미워지지가 않아' 가수 노을이 부른 '미워지지가 않아'의 가사이다. 이 가사만큼 사랑에 대해 잘 표현한 가사가 있을까?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크고 작은 이유로 미워졌다. 좋아지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다르다. 어떻게 미워할지, 어떻게 싫어할지 모르는 그런 사람.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든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맞춰주고 싶고 기꺼이 미움받으면서도 나는 조금도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 수조차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또한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아무리 나만의 방식으로 상대를 배려하며 상대를 위하고 상대를 항상 생각하며 지낸다 해도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거부한다면 상대방이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집착, 자기만족이다. 사랑을 혼자 한다면(사실 그건 사랑이 아니지만) 그건 단지 사랑이 아닐 뿐만 아니라 상대와 나를 너무 힘들게 만드는 정신병이다. 나의 존재의 지속 이유에 대한 생각을 재고하게 할 정도로 행복과의 거리를 벌려놓는 이상증세이다.  

 

사랑은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찬 희생이다. 분명 사랑은 희생이지만 거기엔 아무런 고통도, 실망도, 고생도 낙담도 없다. 사랑은 단지 기쁨만 있는 행복만 있는 그런 희생이다. 사실 희생이라고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인데도 그것이 나에게 유용한 것은 전혀 없는 것이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비밀 상자 속 숨겨진 보물이다. 사랑은 상자를 열기 전까진 보지도 느끼지도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상자의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마음은 자물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자물쇠처럼 상자를 묶고 있는 나의 마음에 어느 날 열쇠에 불현듯 다가온다. 어떨 때는 그 열쇠가 내 맘의 자물쇠를 열었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지는 못한다. 어떨 때는 일 년, 어떨 때는 이년 지나간 시간이 열러 있는 내 마음을 자각하게 할 때가 있다. 사랑에 관해서 나는 철저하게 피동적이다. 그 과정에서 아무런 주체적, 자기 주도적 활동이 일어날 수 없다. 그냥 그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내가 느끼고 받아들일 뿐이다.


사랑은 후회이다. 왜 난 그때 그러지 못했을까? 라는 한탄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는 그것이 사랑의 증거이다. 왜 난 더 잘해주지 못했는지, 내가 너무 나의 방식으로만 사랑을 표현했던 것은 아니지, 왜 내가 그때 더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는지, 왜 더 그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지 못했는지, 왜 그 사람이 아닌 쓸데없는 다른 것들에 정신이 팔렸었는지 끊임없는 후회로 새벽을 지새우게 하는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행복의 동의어이다. 사랑 없는 행복, 행복 없는 사랑스러운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해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사랑의 추억은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면 사랑이 아니다. 행복은 사랑의 동의어이다.

 

모든 빛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세상을 밝히는 것은 동편에서 매일 새벽마다 뜨는 태양이 아니다. 세상을 아침과 조우시키는, 낮과 포옹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다면 해가 떠도 세상은 어둡다. 태양이 뜨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빛이 가득하다. 그 빛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부모님의 사랑, 부모님을 향한 사랑, 연인과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을 표현해 보았다.  이제 우리 사회를 고작 18년 살아가면서 느낀 사회의 잔악함을 표현해보고 싶다.

 

사회 속에는 사랑, 호의, 선의로 가장된 추악한 탐욕과 이기가 판친다. 효용 가치가 있는 상대에게는 눈웃음치며 굽신거린다. 친근한 듯 다가간다. 이해심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 하지만 그 대상의 효용 가치가 없어지는 즉시 사람들은 돌변한다. 단지 관심을 주지 않는 정도라면 다행이다. 잔혹하게 짓밟기 시작한다. 학교폭력, 가정폭력, 직장 내 괴롭힘은 단지 사회 속 매정함, 사회의 폭력성의 극히 일부분이 매우 소심하게 발현된 것뿐이다. 사회에는 그보다 더 큰, 근본적인 폭력이 존재한다. 물론 우린 사회 속에서 따스함, 인간미 있는 공동체를 목도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모습 역시 이기적인 인간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자신의 사회적 평판을 위해 자신의 도덕적 허영심을 나타내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만약 내일, 아니 2시간 뒤에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고 가정해보자. 더는 사회적 평판이 중요하지 않은 그 2시간 동안 개인의 욕망과 욕구를 절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시점에서 존재하는 것은 아마 일부 부모(아마 모든 부모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멀쩡한 사회 속에서 아동학대가 판치는 것을 본다면 말이다)의 사랑, 일부 연인 간의 사랑만일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더는 사회 속에서 사랑이, 호의가, 선심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선한 행위들... 지금의 사회 속에 존재하는 선한 행위들은 선한 행위가 아니라 그 반대의 행위이다.

계속해서 '지금'의 사회라고 말을 하게 되는 것 같다. 혹자는 '과거'의, 역사 속 공동체에 존재하는 사랑을 강조하려고 지금까지 글을 쓴 것일까? 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 그나마 발전한 그나마 선해진 것처럼 보이는 현대 사회가 이렇게 악하다면 예전의 사회는 얼마나 악할지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다. 과거의 사회엔 사랑이 존재했을까? 아니다. 일단 과거의 사회 속에는 신분제도가, 노예제도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문화권을 망라해서 존재했다. 한번 생각해보자. 정말 그때의 사람들은 사회적 분위기, 교육 때문에 신분제도, 노예제도의 부조리함, 부도덕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갔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땡볕에서 일하기 싫으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태생부터 우월하다는 감정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계속 상대방을 착취하고 싶으니까, 내 감정을 풀 대상이 필요하니까, 내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좋으니까 그냥 그저 신분제를 유지하고 노예제를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여성 차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왜 당시 사람들은 여성이 2등 시민으로 취급했을까? 내가 너보다 강하니까, 나 같은 약자는 나에게 반항하지 마라, 토 달지 마라, 집안일이나 하면서 평생을 나에게 헌신하라는 마음을 모든 남성이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북한 정권의 부조리함, 북한의 독재자 가문의 잔혹함과 사악함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를 생각해보자. 북한이 차라리 낫다. 왕 얼굴의 정말 고위직 말고는 볼 수조차 없었다. 왕은 절대자이다. 반역하면 3대를 멸한다. 양반과 평민을 나누어 놓고 평민도 소농 공상으로 나누어 놓았다. 양반과 평민 사이에 중인 계급까지 만들어 두었다. 왕에 대한 반역은커녕 양반의 말에도 거역할 수 없었다. 사회 전체에 논리적 정당화의 과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윗분들은 말씀이 곧 진리였다. 한마디로 모든 국민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다듬어진 변형된 유교 문화에 가스라이팅 당했다. 아직도 조선의 국왕들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존경할 정도로 가스라이팅 효과는 엄청났다. 

 

불과 삼사십 년 전 우리나라만 보아도 독재 정권하에서 삼청교육대, 형제복지원 사건, 민주화 열사들의 고문치사 사건, 518 민주화 운동 강경 진압 등 대놓고 사악한 행동들이 판쳤다. 불과 15년 전만 해도 초중고등학교에서 체벌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놓고 학생들을 차별하고, 자기의 기분을 해소하기 위해 학생을 체벌하고, 학생들은 교사들의 피지배계층으로 보았다. 사회는 정말 악하다. 사회 속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랑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이유 없는 호의는 받아들여지지조차 못하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아니면,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면, 아무런 선의가 제공되지 않는다. 

사회엔 역지사지의 태도를 통한 사랑의 확산이 필요하다. 예로부터 존재한 적 없었던 사랑의 혁명이 필요하다. 산업혁명보다 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혁명에 관해 설명하며 칼럼을 마무리하고 싶다. 사랑의 혁명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저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떠올려보자. 그 삶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푸대접을 받고 괴롭힘을 받고 무시를 받고 화풀이의 대상이 되고 등쳐먹기의 대상이 된다면 그때 나의 마음을 정말 칼로 찢은 것같이 아플 것이다. 내가 사회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품지 않고 행동한다면 그 행동 하나하나는 그 행동의 대상을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찢어 버리는 행위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 모두를 대할 때 자연스러운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결론이 짧게 끝나도 되나?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나의 일생동안 이 한 마디 '저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이상으로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사회에 사랑을 베푸는 동기를 부여한 것은 없었다. 여러분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가며 이 한마디를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사회에는 사랑이 가득 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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